아침에 황소를 끌고 시장에 나간 사람이 그걸 염소와 바꾸고 그걸 다시 강아지를 거쳐 오리 한 마리와 바꾸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오리 새끼 한 마리를 손에 들고 있더라는 옛이야기가 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이야기 같지만, 되돌아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식의 어리석은 거래를 수없이 해왔다.
삶은 끊임없는 거래와 판단의 연속이다. 거래는 자기가 치르는 것에 비해 받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때 이루어진다. 사소한 물건을 사고 팔 때에는 그런 일이 보통 별 실수 없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작 삶의 중대한 국면을 결정하는 중요한 거래를 앞두고는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자기가 무엇을 지불해야하는지를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의 참 모습과 가치는 언뜻 볼 때가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나타나는 수가 많다. 참으로 귀한 것일수록 그 가치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묻혀 있는 보물’이요,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만 눈에 뜨이는’ 값진 보석이라고 비유를 하셨다. 진짜로 가치가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올바른 판단하는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가치를 잘못 판단하거나 잘못된 거래를 깨달았을 때는 그 즉시 거래를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들은 잘못되었음에도 주저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다. 우리의 삶을 바꾸거나 되돌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니다. 문제는 이제라도 머리를 식히고 조용히 앉아서, 얻은 것과 그것을 위해 치른 것을 정확히 따져보고, 사실상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위해 너무나도 귀중한 것을 희생했다면, 그것을 다시 찾아서 우리의 삶 속에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가정과 자녀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을 희생하면서까지 밖에서 성취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까? 사람들간의 인정과 협조 정신을 해치면서까지 추진해도 좋은 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취급하면서 상품을 더 싸게 생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정치인들이나 기업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 향락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공통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의 거래를 위해서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