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유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신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유명한 배우나 가수 사진을 들고 와서 특정 부분을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고 한다. 그런데 고객의 얼굴을 살펴보면 굳이 고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멀쩡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쳐도 원래 모습이 훨씬 좋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무런 말없이 고객이 원하는대로 해 준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면 답답함을 느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없이 남들로부터 외모나 성격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의외로 그것이 충족되는 이치를 간과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 타인들도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타인을 존중하길 어려워한다. 자신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 모자란 사람이 남을 사랑하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악순환을 겪는다. 인간관계란 어김없이 상호 관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수두룩하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수두룩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인정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절대로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주눅 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첫 출발점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 한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주제가 다소 빗나간 이야기지만, 천주교 사제들에게 불문율이 하나가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성당에는 부임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이 생긴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발자취에서 생겨났다.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면 가르침을 주셨던 예수님이 자기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 모습을 본 고향 사람들이 이렇게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를 배웠을까? 그런데 저 사람은 그저 목수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는 이유로 속으로 은근히 깔보며 가르침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유명해진 예수님이 못마땅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큼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이 아무리 큰 성공을 거뒀더라도 ‘고향 사람들’에게는 어릴 적 모습만 기억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어릴 적의 모습이나 편견을 벗어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으로부터의 인정을 받는 기준점은 외모도 과거 삶의 모습도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