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라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갈등(葛藤)이라는 말은 칡나무와 등나무라는 뜻이다. 칡나무와 등나무는 덩굴 식물이고 생김새도 비슷하고 스스로 설 수 없기에 무언가에 의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칡나무는 오른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으로 빙빙 돌며 자라기 때문에 이 둘이 한번 얽히기 시작하면 어지간해서는 풀 수 없다. 그래서 생긴말이 갈등이다. 세상에는 칡나무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나무 같은 사람도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정과 반의 반복적인 통합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현대는 무엇보다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토록 많이 접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만큼 오랜 시간 다양성을 억압해온 탓도 있다. 억압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동을 수반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물리 이론이 인간의 생활에도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정반합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정이 작용이라면 반은 반작용이다. 그리고 합은 작용과 반작용의 갈등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그 무언가다.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있다. 서양말과 우리말이 혼합되어 있는 말로 필요 이상으로 트집을 잡으며 논쟁을 부추기는 사람에게 쓰는 표현으로, 대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도 프로불편러를 만나면 감정과 일이 복잡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프로불편러가 트집을 잡으면 한바탕 분란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우리 주변에서도 공무원들이 지속적인 민원으로 시달리다가 그만두면, 적지않는 확률로 프로불편러들 때문이기도 하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말이 있는데,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불평하는 사람에게 맞서는 이가 있을 때 갈등은 생긴다. 그래서 해결 방안으로 ‘불평하는 사람의 의견도 존중하면 갈등을 완화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경>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를 잘 음미해봐야 한다. 그리고 ‘내 의견이 항상 옳다’는 생각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다양성의 진짜 의미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모두가 ‘예’하고 외칠 때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의 의견을 경청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한 문화가 존중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아직도 건강한 사회라는 증거이다. 진정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은 다양성을 향한 못마땅함까지도 존중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다양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셈이고 그런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