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버리다
‘자신을 버리다’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표현한다. 내용은 자신의 욕심과 고집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어 그대로 해석해서 자기 몸을 어디에다 버리는 것으로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는 모습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는 모습일 것이다. 내가 소유한 돈이나 물건일 수도 있고, 시간이나 노력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서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적 가치를 본질적으로 훼손하지 않는 일이라면, 내 의견을 고집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뜻을 존중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나의 이익과 상대의 이익이 서로 대치될 때, 예를 들면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데 상대방과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서로 다를 경우,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따라주는 모습이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을 버리다’라는 말의 의미는 내 몸을, 내가 가진 것을, 내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고 싶은 마음,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상 나도 모르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인데, 그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버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 중심의 욕구를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나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시선의 중심을 타인을 향해서 보고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모습의 훌륭한 예를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에게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고린 9,19-22). 이 말씀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내 중심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삶, 곧 자기 자신을 버리고 상대방 중심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