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과 원추리꽃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5-01-30 06:19 조회수 : 82
을사년과 원추리꽃
우리 전통의 새해인 구정으로 다사다난했던 갑진년을 보내고 을사년이 새롭게 맞이했다. 오전에 새해를 맞이하는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고 하루 종일 혼자 지내면서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올 한해의 계획들을 생각해 보았다. 날이 추워 밖에 나가지는 못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웃에 있는 아파트 정원에서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살짝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 문뜩 한송이 꽃이 생각이 났다. 내가 연천 학교에 근무했을 때 학교주변과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원추리라는 꽃이다. 원래 옛 이름은 넘나물이라고 불렸던 풀이다. 이 꽃, 아니 풀은 옛날에는 우리 어른들이 장독대나 뒤뜰에 심어놓을 정도로 흔했다. 이 원추리는 새순이 자라는 봄에는 줄기를 잘라 살짝 물에 데쳐서 먹는다. 넘나물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원추리를 우리 주변에 흔하게 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임신한 여인이 원추리의 노란색 꽃봉오리를 머리에 꽂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남아선호 사상이 만들어낸 좋지 않은 풍습이긴 하지만, 그 꽃봉오리가 꼬마들의 고추를 닮아서일 것이라고 추측이 된다. 그러나 이유가 어쨌든간에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을 누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꽃 하나에도 이렇게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싣고 있다.
원추리 꽃은 등황색이다. 색동 저고리의 노랑색이나 신혼의 새색시가 입던 노랑저고리에 분홍 치마, 그 노랑색이 바로 등황색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 아니 우리 땅에서 소리 없이 피고 지면서 그렇게 이어져 내려오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온 꽃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런 꽃들은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바라보는 꽃이 아니다. 좀 멀리서 그윽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바라보아야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보이는 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피고 진 목숨들이 누구를 사랑할 때 그랬듯이 말이다. 바로 이런 느낌을 우리는 은근함으로 표현을 해왔다.
원추리의 다른 이름은 망우초(忘憂草)이다. 근심을 잊는 꽃이라는 그 또 다른 이름처럼 말이다.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잊어야 할 것이 많은 것일까? 얼마나 잊어야 할 것이 쌓이고 흘러 넘치기에 꽃에 까지 사람의 마음을 기대며 잊고 싶어했을까? 그러나 산다는 것은 잊어야 할 것이 있기에,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 있기 마련이다. 새롭게 펼쳐진 올 한해는 소중한 것들을 가슴에 더욱더 많이 담아가면서 살고 싶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나는 무엇을 누구를 가슴에서 잊고 그리고 또 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