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기쁨이 없다면
어제는 ‘주님 세례 축일’이었고 오늘부터는 성탄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로 넘어간다. 연중시기에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우리들의 ’믿음’을 키워나가는 시기이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선행은 좀 부족할지라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분명히 갖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졌길래 우리의 신앙생활이 불완전할까?
16세기 초 종교개혁 운동으로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시작이 되는 계기를 마련한 마르틴 루터는 '성 아우구스투스 수도회'의 수사였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신심이 깊고 수도생활에 충실하여 가장 모범적인 완벽주의자였다. 그러나 자신을 성찰할 때마다 형제들을 미워하고 식탐과 게으름, 시들지 않는 욕정 등 늘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고 괴로워하였다. 계명과 수도서원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고뇌에 빠진 그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성서를 읽고 기도를 하다가, 로마서 3장 22절 “율법으로 의화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화된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꽂히게 된다. 그는 그날 이후로는 진실한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완전한 믿음이 곧 구원’이라는 루터의 생각은 개신교 영성의 기초가 되었고 그 신앙전통은 50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개신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가 되었다. 개신교 신자들이 믿음을 강조하고 성서공부를 중시하는 열정 뒤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반면 가톨릭은 ‘행동하는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에 더 영향을 받아서 믿음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사회정의에 헌신’에 바탕으로 복음을 실천하는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르틴 루터는 율법과 믿음을 하나로 보아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가져도 산을 옮길 수 있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실천 없는 믿음이란 완전한 믿음이 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없는 이유는 실천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것은 온전히 ‘행동하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제자들처럼 신앙생활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의무감에 매여 있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주님, 저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청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앙공동체 생활에서 기도와 봉사를 의무감으로 여기지면 억지로 한다면 고역이다. 살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만족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신앙을 실천하면 우리의 구원은 가까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 창조질서를 따르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