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과 자살
미사가 끝나면 어르신들이 잔뜩 카페에 오셔서 커피나 차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각자가 갖고온 주전부리를 꺼내서 나누어 드시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면 카페를 직접 운영하는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본다. 언젠가 까페에서 어르신들이 예전에는 이웃집이 끼니거리가 없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쌀이 떨어진 집은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어려운 살림이지만 슬그머니 집 앞에다 곡식을 한 되박을 가져다 놓는 것이 시골 인심이라고 하시면서 가난해도 그때는 인심이 후했다는 어르신의 말씀과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외로움과 자살현상을 두고 남의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곤 한다. 그 힘든 보릿고개 시절에도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그 시절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한 이 시대에 도대체 무엇이 어려워 목숨을 스스로 끊느냐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필요한 지적이고 야단이겠지만 한편 생각하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릿고개 시절은 분명 지금보다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너나할 것 없이 다 어려웠던 시절이다. 최소한 지금과 같은 상대적 박탈감은 없었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많았다. 여러 명의 형제가 한 방을 쓰던 그 방 한구석에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든지 ‘형설지공’이라는 표어를 붙여놓고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노력을 하면 그 만큼의 결과가 주어지는, 어찌 보면 가난했지만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체념하는 이들은 신앙까지도 포기를 하고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난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절망으로 내몰고 있고, 그런 절망의 끝에서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루 평균 50명 가까이 자살을 한다는 이 시대, 너무 감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관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도 살기 힘든데, 남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 사치나 오지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관심이 끊어지는 것이 비극의 가장 큰 이유라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극한의 선택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 제발 내 손을 잡아주세요”라는 시그널을 은연중에 보낸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끊어진 관심을 한올 한올 연결시키지 않으면, 죽음과 절망은 너무나도 쉽게 우리 사이를 마음껏 헤집고 다닐 것이고 이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선택을 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