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적인 눈, 마음의 눈
나이가 들면서 가장 큰 변화는 신체들이 전반적으로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눈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성당 2층에 있는 성가대원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식별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약간의 위로라면 육체적인 눈이 나빠지긴 했지만 동시에 남의 단점을 보는 눈도 함께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남들의 단점이 안보이기보다는 왠만하면 이해하고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전보다는 남의 단점을 잘 보지 못한다고 표현하는 것도 틀린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에는 누군가가 잘못하면 즉시 단죄하고 무시했는데 이제는 좀 더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분명히 변화가 온것이다.
마음의 눈은 한결 좋아진 것 같다. 사람을 보는 눈이 긍정적인 눈이 좋아진 것이다. 전에는 사람을 볼 때 잘 안보이던 장점이 확실하게 잘 보인다. 청소년의 시기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좋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 친구들 이야기를 할 때는 단점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장점만 이야기해서 어머니로부터 핀잔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면서 다시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전보다 밝아진 것이 확실하니 진심으로 기쁘다. 사제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변화라고 생각된다.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내로남불'이다. 사전에는 없는 조합된 말인데,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예전 국회의원이 사용한 말이 고유명사처럼 되어 있다. 같은 행동을 다른 잣대로 재면서 자신의 행동은 아전인수격으로 좋게 보고 남의 행동은 나쁘게 본다는 이중잣대를 빗댄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창조의 신인 프로메테우스가 사람을 만들 때 두 개씩의 주머니를 앞 뒤에 달아 놓았다고 한다. 앞에는 남의 단점을 담은 주머니와 자신의 장점을 담은 주머니는 달아 놓았고, 뒤쪽에는 자신의 단점을 담은 주머니와 남의 장점을 담은 주머니는 매달았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자신의 장점은 크게 보고 자신의 단점은 못보는 것이 어리석음을 저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도 비슷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고 말씀하시며, 이웃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제자들을 야단치셨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도 환갑을 넘은 지금에서야 겨우 앞과 뒤의 주머니를 서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으니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의식적으로 남의 단점과 나의 장점을 담은 주머니를 뒤로 보내고 나의 단점과 남의 장점을 담은 주머니를 앞으로 가져오려고 더 노력할 것이다. 여러분의 오늘도 앞과 뒤의 주머니를 한 번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