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순명과 하느님의 축복
어제부로 7주간 계속되었던 구약성경 강의를 끝내려 했지만 진도가 남아서 부득이하게 다음주까지 연장을 하기로 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열심히 들어주시고 계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강의를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에 내 스스로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성경을 다시 한번 더 정리할 수 있었고, 특히 하느님의 말씀대로 순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유대인들의 삶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을 때 내려지는 축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도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젊었을 때부터 순명은 신부들이 당연한 가져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렵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대림동 성당으로 발령받았을 때를 제외하곤 항상 교구장님께서 발령지를 미리 알려주셨다. 이 말은 새롭게 부임하는 곳은 해야할 일이 많거나, 사목이 절대로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피하지 않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
순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성인의 명성을 듣고 제자가 되고 싶어서 두 명의 청년이 찾아왔다. 성인은 두 사람에게 밭에 가서 채소의 뿌리를 하늘 쪽으로 심고 오라고 했는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 명은 밭으로가서 말없이 열심히 했다. 그러나 한 청년은 채소를 거꾸로 심으면 죽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 생활의 기본인 순명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졌는지를 시험한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때로는 세속 사람들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신앙인들에게 순명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이유는 완전한 믿음은 절대적인 순명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절대적인 순명은 완전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순명은 항상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부당하고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늙어서 겨우 얻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 인간의 눈에는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어보이며, 때로는 무모한 명령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복종함으로써 그의 믿음은 검증되었고 덕분에 생각하지 못했던 더 많은 축복을 약속 받게 된다. 이처럼 순명을 통한 믿음은 축복도 가져오지만 그 과정 안에서는 커다란 시련과 아픔을 동반한다.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한 마디 이유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고뇌와 번민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더 컸던 것이다.
반면 자식은 커녕 주어진 시간의 일부분과 지폐 몇 장 봉헌하기도 망설이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하느님께 순명하기보다 권력에 복종하고, 진실에 순명하기보다 부정과 거짓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내 순명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하심을 실행하기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신다. 우리 모두는 귀하디 귀한 아들을 의심없이 봉헌하고자 하셨던 아브라함의 순명 정신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이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