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에서 핵심은 유다의 배신과 그 과정이다. 최고 의회는 그동안에 군중들의 눈치를 보다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다(요한 11,53 참조).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은 체포할 적당한 시기와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유다가 사제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수석 사제들에게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라고 물으며 어떤 대가를 요구한다. 유다는 돈을 받기로 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게 된다(마태 26,16 참조). 그리고 유다는 길 안내를 함으로써 그 일에 협력하게 된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신하려고 마음을 먹었을까?
성서에서는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묵상을 통해서 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나는 유다가 평소에 생각했던 메시아의 가치관이 달랐기에 자신을 뽑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살다 보면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래서 떠나갈 수는 있다. 하지만 유다는 떠나는 방법이 나빴다.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따라다녔던 시간에 대해 아쉬움과 그 기간을 돈으로 보상받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판단이 훗날 배신자의 아이콘으로 그리고 가장 불행한 신앙인으로 남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실 때 이미 유다가 배반한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암시해 주신다(마태 26,21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할 유다의 이름을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고 마지막으로 몇 년 동안 함께한 그를 위해서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으로 묵상된다.
제자들은 자기들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무서워서 걱정하면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하고 묻기 시작한다. 아직은 나약한 그들은 서로 자신은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보다 ‘그 배반자가 저입니까?’를 예수님께 묻고 있다. 그 질문 속에서 어쩌면 작든 크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유다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믿음이 약해지면, 다른 제자들도 유다가 같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묵상하게 된다. 마치도 어제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말이다. 배신은 남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삶을 살면서 우리 모두는 유다처럼, 때로는 베드로처럼 자신의 메시아를 버리고 자그마한 이익이나 신변을 위해서 눈을 감거나 적극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성주간 동안에는 나의 잘못된 약점과 잘못된 소신을 고쳐나가는 시간으로 채워진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