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베트남 가톨릭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33년경부터 중국으로 가던 유럽 선교사들에 베트남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베트남 가톨릭교회의 시작이다. 1651년에 '베트남의 사도'로 불리우고 있는 예수회의 로드신부가 1624년 성탄절부터 1645년까지 수만명의 베트남인들에게 세례를 전해 준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국가였던 베트남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늘 박해는 있었다. 18세기에 3번의 박해와 19세기에는 더욱 잔인한 박해가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의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프랑스는 1862년에 침략을 시작해서 1883년에 식민지에 성공을 하면서 외형적으로는 박해가 끝났다. 1625년부터 1886년까지 53차례의 박해로 인하여 십칠만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고 그중에서 117명이 1988년 6월 19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성인들 중에는 베트남인이 96명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 11명 그리고 10명의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포함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김대건 신부님에 해당되시는 분이 베트남에는 안드레아 둥락 사제이시다. 1795년 오늘날 박린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서품을 받은 후 많은 신자들과 함께 박해 중에도 주님을 굳게 믿고 전교와 사목 활동 중에서 민망황제의 박해기간 중인 1839년 12월 21일 하노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를 하셨다.
박해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했는데, 오랜 기간 박해를 받고 살아 왔던 베트남 신자들은 외부인들로부터 신앙을 지키기위해 스스로 울타리를 쳤다. 타종교인 및 일반인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고, 신앙인들만의 공동체의 삶을 이루면서 살았다. 심지어 천주교 공동체는 '국가 속의 작은 국가'라는 비판을 받기 받을 정도였다. 실제로 1954년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뉠 당시, 북 베트남 지역의 신자들이 70만명이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남쪽으로 내려왔을 정도로 결속력이 대단하다.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은 고위공무원이나 국영기업에서 간부급으로 승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가치보다는 신앙을 선택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갖을 수 있는 직업의 대부분은 자영업이지만 베트남 신자들은 하느님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미련이나 후회가 없다고 한다. 이번 성지순례 중에 베트남의 신자들 80여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박린에서 왔다고 했는데 박린에서 다낭까지는 버스로 1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지만 그들은 성모님을 만난다는 기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오셨다고 해서 마음이 숙연해졌다.
무엇보다도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감동을 받은 것은 베트남 신자들은 국가로부터 많은 견제를 받고 있지만 결코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없고 특히 냉담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사제인 나와 신자들이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두 번의 공식적인 성모님의 발현과 베트남 신자들이 갖고 있는 신앙심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신앙보다는 물질과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순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주님의 자녀로 거듭태어나길 깊이 다짐한 참으로 보람찬 성지순례였다.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다낭 주교좌 성당(외관이 핑크색이라서 핑크성당이라고도 불리운다)
다낭 대성당에서 조배를 하고 있는 순례자들(성전에서 기도를 하면 9월까지 전대사가 있다)
미키비치에 있는 바다의 별 성모님
다낭 미키비치에 있는 살트르 바오로 수녀원의 예수성심상 앞에서 파견 기도를 하는 순례자들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순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