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소경은 아니시지요?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향했던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찬란히 빛나는 빛을 본후에 소경이 되었다가 하나니아스라는 신자를 만나서 그의 안수를 받고 다시 시력을 되찾아서 보게 되었고, 그 후에 회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언젠가 내가 사목하던 본당에 맹인을 위하여 일하시는 수녀님이 후원회원 모집을 위해서 방문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수녀님이 하신 말씀 한 구절이 생각이 난다. “남들은 우리 집에 소경이 많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 집엔 소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물질들은 못 보지만 세상을 초월한 하느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학생 시절에 꽃동네에서 한 주간 동안 봉사하고 있을 때 오웅진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도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거지가 어디에 많냐고 물으면 꽃동네에 많다고 하는데 꽃동네에는 거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사랑을 주고받고 있고, 심지어 자기 눈이나 장기 등 몸뚱이까지도 봉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과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어 묵상을 해본다. 소경은 누구이며, 진정한 거지는 어떤 사람인가?
프랑스 파리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을 때 초라한 옷차림을 한 소경 한 분이 500유로짜리 1장을 헌금함에 넣었다고 한다. 헌금함을 지켜보던 위원이 그 소경에게 가서 헌금을 잘못한 것 같다고 하면서 그 돈을 돌려주려고 하자 그 분은 헌금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위원은 “어떻게 그토록 큰돈을 헌금하셨나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소경은 “언젠가 저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집에 전깃불을 사용하려면 1년에 얼마의 돈이 들어갈까? 그 친구가 아마도 500유로 정도는 들지 않을까? 하고 답을 했지요. 보시다시피 저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서 등화비가 한 푼도 안 들어갑니다. 그 등화비를 아껴서 육신의 어둠보다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영혼의 소경들에게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주는 데 사용하려고 봉헌 한 것입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소경은 육체적인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더 이상 소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육체적인 소경의 삶을 승화시켜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눈을 뜨면 세상을 보지만 눈을 감으면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어떤 시인의 시구절이 떠오른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온통 세상의 것만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눈동자가 아니던가. 돈만을 쫓기 위해 부릅뜬 눈,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으로 충혈된 눈, 교만으로 가득 차고,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우리 눈동자가 아니던가.
누군가 사람의 눈은 그 사람의 마음의 거울이라 했는데 눈을 뜨거나 감아도 온통 세상의 것들만 욕심내고 그리워한다면, 그는 비록 육체적인 눈은 건강하나 하늘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행여 눈뜬 소경이 아니길 기원해본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 볼 수 있어도 안 보려고 피하는 눈, 보고서는 안 본 척하는 눈은 갖고 계시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을 느끼며 믿음과 희망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눈뜬 소경을 피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오늘은 사도 바오로가 회심을 통해서 구원의 첫 걸음을 띤 기념비적인 날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