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은총
뉴욕의 브루클린의 한 서민 아파트에서 가족이 전혀 없는 할머니가 사망했는데, 그분은 지하도에서 구걸하며 살던 할머니였다. 그날도 80세가 넘었던 이 할머니는 사람들 왕래가 잦은 그곳에서 구걸하다가 추위에 쓰러져서 돌아가신 것이다. 가족이 없었기에 할머니의 유품을 시 직원들이 정리를 하다가 할머니의 침대 밑에서 4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예금한 통장을 발견한 것이다. 그 정도의 돈은 미국 중산층도 갖지 못한 엄청난 돈이었다. 그렇게 많은 돈이 있었지만 제대로 먹지도 않고 기름도 아끼다가 배고픔과 추위로 숨을 거둔 것이다.
요즘처럼 과소비가 만연한 가운데 본받을 점도 있으나,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라 참혹한 종말을 자초한 것이다. 이는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어리석음이다. 자연은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주는데, 인간은 욕심을 부리다 쓰러져 버리곤 한다. 인간이 마지막 가는 길에 입는 수의는 동전 한 푼이라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없다. 그리고 재산도,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내려놓고 자그마한 관에 묻힌다. 그런데 나누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한없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제가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짐들이 늘어났다. 특히 그중에서도 늘어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만과 아집이요, 또 하나는 책과 옷이었다. 신학생 때의 순수함과 겸손함은 사제의 경륜을 쌓으며 퇴색해져만 갔다. 언젠가 이동을 위해서 짐을 싸주던 한 교우가 “신부님은 옷이 많네요.”라고 하신 한마디가 심하게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후로는 입지 않는 옷은 전부 모아서 부산에 있는 노숙자들에게 보낸다. 세월이 지나면서 늘어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때, 그때 비로소 신부의 모습이 제대로 나온다고 생각한다. 버릴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했다는 증거이고,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떨어진 양말 한 짝도 남 주기 아까워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버려야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공허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절망에서 희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꿔주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이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은 슈바이처 박사는 30세에 이미 음악가로서, 또한 철학과 신학박사로서 명예와 부귀가 보장된 젊은 엘리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우편물이 잘못 배달돼 자기 집으로 온 것을 되돌려주기 위하여 이웃집으로 발길을 향하던 중, 우편물 속의 아프리카 관련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은 후에 고민하다가 다시 의학 공부를 하여 의사가 된 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자기에게 보장된 모든 명예와 부귀 영화를 버릴 줄 알았기에 위험한 아프리카로 과감하게 떠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버림으로 훗날 더 큰 것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도 늘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과 아집, 위선과 독선 그리고 내가 가진 옷, 책, 재물, 명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