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와 양말
가끔 생각하지도 못했던 예전 생각이 불쑥 난다. 잊혀 있던 기억이 새록 날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그 기억이 현재에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보좌신부로 살았을 때 이야기이다. 본당 신부님이 서울교구에서 가장 무서우신 분이라서 숨 한번 크게 쉬는 것도 조심스럽던 시절에 동창이 놀러 왔다. 저녁에 밖에 나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냉장고 안에 신자께서 주신 와인과 안주로 간단하게 기분을 내려고 하였다. 안주는 비닐종이에 아주 곱게 쌓여 있었다. 나는 와인 잔을 가져오려고 주방으로 향하면서 동창보고 비닐 포장을 뜯으라고 했다. 잔을 갖고 왔는데 동창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안주가 상했어?”하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친구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양말이었다.
맛있는 안주려니 생각하고 냉장고 속에 넣어 두었던 물건이 양말로 변하여 나타났으니 무슨 기적이 일어났나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래전 어느 교우께서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오는데 자매님께서 “신부님, 좋은 와인이니 맛있게 드세요.” 하면서 와인 한 병과 비닐종이에 싼 작은 박스를 받았던 생각났다. 성당에 와서 아무런 생각없이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나는 그것을 풀어보기 전까지는 당연히 안주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자신의 고정관념을 갖고 굳게 믿고 살면 자기 착각을 일으켜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이 사건을 나도 모르게 다시 떠오른 것은 하느님께서 나라는 부족한 인간이 자기의 삶 속에 함몰이 되어서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마치도 사랑하고 합리적이라고 포장하면서 고이 보관하면서 살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냉장고 안에 ‘나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간직하면서 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산 것이었다. 착각에 의해서 벌어진 평범한 사건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사제로 산 28년을 글로 쓴다면 세상의 종이도 부족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착각이 분명하지만, 그동안 많은 일과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깨우치심과 이끄심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모두가 사랑이고 은총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부족한 나를 이해하고 협력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매사를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사람들도 모두가 내 부족함을 채워주신 분들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언제나 잡소리가 나고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시는 점은 인간의 삶은 처음도 끝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쭙잖은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남보다 조금 많이 가진 재물이 사람을 유혹하게 만든다. 포장지를 뜯지 않으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모르는게 인생사다. 내년에는 절대로 지레짐작으로 매사를 판단하지 않기를 주님께 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