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잉태한 텃밭
누군가 말했다. ‘접촉은 줄어들고 접속’만 늘어가는 시대, 휴대폰의 화면을 바라보느라 인생의 드라마틱한 세계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연마저도 삶의 편리함과 재산증식을 위해서 개발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들로 가득해서 많이 불편하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세상사람들의 의식에서 혼미해지고 순수한 영적 세계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주일은 그저 달력에 새겨진 빨간 날, 휴일로만 인식하면서 창조 작업이 끝난 후에 참된 쉼의 의미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게 엉망이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씨 뿌리는 사람’을 설명하셨다. 씨는 하느님 말씀이고 땅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고 삶의 태도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지만 그렇지 못한 땅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깊게 박히지 못한 채, 숨이 막혀 끝내 열매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씨도 그 씨를 받아 가꾸는 이의 정성이 없다면 결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은, 신앙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절대성을 간직하지만 인간의 책임하에 이루어진다는 상대성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하느님 사랑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인간 믿음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인 인간의 몫이다.
삶이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세상에 던져진, 세상에 뿌려지는 씨앗과 같은 것이 아니라 씨앗을 잉태한 텃밭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삶이란 떨어지는 씨앗을 피할 수 없고 씨앗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것을 품고 키우는 선택은 할 수 있다. 떠오르는 태양은 막을 수 없지만 우산을 들고 나갈 것인지 양산을 들고 나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고, 삶의 냉혹한 비바람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디딤돌이 되게 할지, 아니면 절망과 포기의 장벽이 되게 할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삶의 조건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좋은 밭인지 나쁜 밭인지는 그 밭에 열린 결실로 드러나는 것임을 안다면 씨를 탓하거나 주어진 조건을 탓하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고통 중에도 인내를 품고 절망 속에도 희망을 볼 수 있으며 지상의 끝자락에서도 천상의 첫 계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될때, 세상을 창조해주신 하느님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