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참포도나무
나와 함께 같은 본당에서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1년 선배가 전에 내가 근무하던 본당으로 발령이 나서 축하도 해줄 겸해서 어제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한참하고 있는데 식당 주인이신 자매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하시면서 가을에 들어서니 몇 년전에 선물로 받았던 포도가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몇 년 전에 아시는 분이 포도 농사를 짓는데 판로가 어렵다고 하셔서 몇 년 동안 가을마다 여러 박스를 구매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은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 나에게 포도를 받으신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나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포도나무가 들어오고 재배를 하는 과정에서 선교사 신부님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포도의 대명사인 안성에 포도가 자리잡는 과정에서도 프랑스 신부에 의해 번식되었고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혜화동 일대에도 베네딕도의 넓은 포도원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포도 농사를 통해서 자신들이 고향에서 마셨던 포도주와 미사주를 해결했고 가난한 교회의 살림을 꾸려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에 살고 있던 가난한 백성들의 일거리도 제공을 했다고 한다.
복음에서는 농부인 하느님 아버지와 포도나무인 예수님 사이에, 그리고 포도나무인 주인과 그 가지인 우리 인간 사이에 이 사랑이 깊게 배어 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구세사 안에서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인간은 광야에서 마구 자라온 야생 포도나무와 같다. 하느님은 이 포도나무를 지극 정성으로 키우고 돌보아 주시지만 그 결과는 늘 실망과 후회뿐이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의 운명을 담고 있다. 포도 농사꾼은 겨울에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고 살아있는 나뭇가지도 일부는 전지하는데 이는 더 많은 포도송이를 소출하기 위해서다. 만약 이런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는 작은 포도송이만을 수확할 뿐이다. 농부들이 가지치기를 할 때 포도나무에서는 수액이 나무의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수확해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저히 부서지고 으깨져야 한다.
예수님도 포도나무와 같은 삶을 사셨다. 십자가 나무 위에서 피흘리는 참혹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포도주가 되셨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손수 참포도나무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서 마실 새 포도주로 변하신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는 일치의 기쁨과 행복을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설명한다. “향기로운 포도주를 마심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영혼 전체 안에 실제적으로 펼져지는 것이며, 영혼이 하느님 안에 변화되어 사랑하는 님이 나를 당신의 사랑 안에 두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마시게 하신다”(영적찬가 26).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하고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호소하신다. 이 말씀은 바로 당신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의 중요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것이다. 기도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과 함께 살려는 신앙 행위이다. 이를 위해서는 포도나무인 주님과 가지인 내가 함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