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해서
성당에서 면담을 나누다 보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남편을 잘못 만나서” “시부모님 때문에” “자식이 말을 안 들어서”이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경향이 지나치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속상한 일이 생기면 일단 그 원인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첫 번째로는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는 외부 환경을 바꾸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 조금만 달라진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무의식적 두려움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본다는 것은 어두컴컴한 동굴을 들어가는 것 이상으로 두려운 일이다. 자기를 보호하고 싶은 본능 때문에 차라리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난의 화살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무력감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때는 누구나 무력감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외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무력감에 빠지려는 자기를 보호하려고 한다.
네 번째로는 자신 안에서 찾기보다는 외부에서 찾는 것이 시간상으로 빠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엉킨 실타래에서 실 끝을 찾는 것과 같은 더디고 지루한 자기성찰을 포기하고 “저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이런 태도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피하고, 자신을 현재 상황에 부닥치게 한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눈길을 돌린다. 그래서 그 원인 제공자를 변화시키겠다고 필요 이상의 노력을 하게 되는데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은게 보통이다. 상황을 개선하기보다 더 어렵게 만들거나 자신의 고통을 가중시키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고통에 관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심리적 고통은 없애거나 벗어나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심리적 고통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자신을 돌아보라는 신호이자 변화를 요구하는 내면의 소리이다. 그래서 마음이 상처를 입었을 때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내 탓이요’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내 탓이요’는 자기 자신을 탓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내 탓이요’는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이해를 하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 이해는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명확하게 보도록 해주고, 그 원인을 찾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좀 더 성숙시켜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