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아라
날이 너무 더워서 외부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방에서 보내고 있다.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볼일이 많아졌다. 어제는 지난 이른 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눈을 감고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그때 순례를 하면서 많은 분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면 행복이라는 것은 그리 멀리있지 않다. 다만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를 얻으려고 지금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더 큰 행복을 얻으려고 수많은 노력과 희생을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네 인생에는 나약한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 한계를 대부분 체험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레 신앙에 의지하게 된다.
예전에 평일미사에 열심히 나오는 초등부 주일 학생이 있어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의외의 답이 나왔다. 꿈에서 아주 생생하게 예수님을 뵈었고 인자하신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평일미사도 열심히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내심 놀랐다. 그 학생의 신앙심이 부러울 정도였다.
많은 교우들과 상담하면서 공통으로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신앙이 흔들릴 때 한 번만이라도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뵈면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꼭 그럴 것만 같지는 않다.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그마치 삼 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수없이 식사도 함께 하고 가르침도 직접 받았지만 그들의 초기 신앙심은 어땠는가?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어려울 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도 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단돈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고, 신앙 체험이 많으면 더 깊은 신앙심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기에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알고 모름이 아니라 그 의미를 파악하는게 더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형편없어 보이던 제자들이 아주 놀랍게 달라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많은 가르침을 예수님한테 직접 듣고도, 그 놀라운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망설였던 완고한 마음이 부활사건과 성령을 받게 되자 비로소 의심 없이 믿기 시작했고 마음이 평화로워 졌으며 하느님의 뜻대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는 순교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앙의 본질과 의미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늘 함께 있을 것 같았던 예수님이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은 한 순간 공허해졌다. 마치 혼잡한 거리에서 엄마의 손을 순식간에 놓친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우면 채워지는 법이다.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그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로 인해 그들은 기쁨이 넘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은 은총의 삶으로 변화되고 비로소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