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자리와 정상자리
지하철을 탈 때 가끔 목격하는 장면이 있다. 차례로 줄을 서 있다가 지하철의 문이 열리면 서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뒷사람이 앞사람을 밀치고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의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일 경우가 많다. 물론 몸이 불편하니 서서 가는 것보다는 앉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일 거다. 이런 때 많이 쓰이는 말인 ‘체면불고’가 생각이 난다. 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을 때 행상을 하기 위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람들도 가끔은 보게 된다. 아마도 자리가 자신의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에 사생결단하고 다투는 경우일 것이다.
자리는 그 사람의 체면과 역할을, 사회적 지위와 능력을 그리고 때로는 이해관계를 나타내고 드러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해주셨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루카 14, 8-10)
복음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다. 이때 다른 제자들은 그 두 사람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유는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 역시 그 자리가 탐이 나기는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정상의 자리는 영광의 자리로 단 한 사람만이 차지 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그러나 누구나 차지하고 싶어 하는 그 자리는 외롭고 고독한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높은 자리를 지키거나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래서 정상의 자리는 완성이 아니라 반환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상에 올라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오를 때와는 달리 내려올 때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앉을 수 있는 낮은 자리는 많은 사람들과 왕래하고 이해관계가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기에 인간다운 정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라는 삶의 터전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실 자리가 있다면 어떤 자리에도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한다. 이유는 그 자리에 평화가 있을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이며 완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