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마음을 드높여 쳐다보아야”할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그분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예수가 정말로 메시아였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결코 그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답을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말씀은 오해의 여지없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인류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에게는 민수기에 나오는 ‘구리 뱀 이야기’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구리 뱀의 일화는 “높이 들려 매달린”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점은 믿음에 있다. 이미 구약성경의 ‘구리 뱀 이야기’에서도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구리 뱀을 쳐다보았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게 된다”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해 내려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위의 모든 말은 “그분께서 부활하시어 살아계시다”는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분으로 끝났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극치일 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신 상태로 끝난 분이 아니라,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요 ‘구세주’로 계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결코 잊지 말라고 초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류를 사랑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게 되고, 더 나아가 그분의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잊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에 의하면 이 사랑을 떠나서는 영생도 구원도 없다.
한편, 복음에서는 불신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말씀은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죄스러운 실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일부러 환한 빛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사랑을 피해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께 문을 닫아걸고, 그 하느님 사랑의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여 일부러 어둡고 추운 골방 속에 갇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