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우리는 눈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행복을 가늠하는데 익숙해 있다.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장에다니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부자가 되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배운 것도 별로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을 정도의 위치나 재물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쉽게 단정한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이면 부와 자원의 공정한 배분, 인간 그 자체의 존엄함, 품위 있는 인격, 순수한명예 등의 고상한 가치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예레미아 예언자의 고발처럼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의 장난에 우리가 휘둘리고 있지 않은지 묻게 된다. 왜냐하면 눈으로 측량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은 어쩔수 없이 서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서열의 앞뒤자리가 행복과 불행을 가르고, 다수의 행복을 만들기보다는 소수 만을 위한다면, 그것은 결코 현명한 자세도 성숙한 태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모두가 그렇게 외적인 조건을 기준삼아 행복을 놓고 경쟁하는 이유가 소수의 경쟁력 있는 이들의행복을 강화시켜주고 지속될 수 있게 만든다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한다.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이들에게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웃기는 소리밖에되지 않는다. 그들 눈에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모욕을 당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뿐이며,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고 좋은 말을 듣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낙오자의 자기 위로와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죽 못났으면 가난하고, 오죽 무능하면굶주리고, 오죽 변변치 못하면 울고, 오죽 한심하면 모욕을 당하겠느냐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복음 안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다하신 것은 그들을 위로하며 달래거나, 내세의 행복을 약속하며 현실의 고통을 무마하기 위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삶의 태도와 마음을 바꾸어야 함을 역설하신 것이다. 다수를 외면하고 소수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안되고 함께 살 길을 찾으라는 촉구이다. 당신이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과 빵을 나누셨듯이, 우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고 따돌림 받은 이를 보듬어 주셨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 것이다. 당신 스스로 불행한 길을 걸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백성 위에 올라서려 하지 말고 그들과하나가 되기를 가르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은 세상 한복판에서 ‘참 행복’을 위해 교회를 세워 성장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하셨던일을 하지 않은 채 자기 몸집 치장이나 하고 몸집 불리기에 온 힘을 다한다면, 그것은 현세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