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떨어져 나 자신을 바라보자
벌써 3월하고도 마지막 날이다. 새해가 시작된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한해의 1/4이 지나갔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본다. 살다보면 해야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도통 힘이 나질 않을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러한 날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서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의욕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기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열심히 살고 싶은데 에너지가 고갈되어 몸과 마음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답답한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우리 내부에서 발생되는 에너지는 외부 환경과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물론 매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살펴봐도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돈이 많다든지, 높은 지위나 권력을 누리다든지, 명예를 한껏 맛보고 있다든지, 몸의 건강상태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거나, 혹은 냉철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있으면 힘이 나올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물론 젊고 건강하고 열의가 있을 때는 그 힘만으로도 삶을 지탱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피상적인 힘이 아닌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그래서 강한 힘의 존재와 그 힘의 활용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 내부의 근원적인 힘은 외적인 활달한 기운과 생동하는 여건으로부터 나오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고요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고요한 마음으로부터 내적 에너지가 강하게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고요를 유지한다는 것은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지 않는, 마치 잔잔한 호수 같은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말일까? 결론은 아니다. 그것은 동양의 옛 선인이 이야기 했다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을 지켜낸다는 뜻이다. 윤집궐중이란, 사물과 진리에 있어서 그 중심을 붙잡으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이란 양극단을 더해 산술적인 평균을 낸 중간 값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기뻐도 마음껏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한껏 슬퍼하지 않으며, 그 중간의 적당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중’이란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 두기’를 한다는 말이다. 양극단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외적 환경으로부터 살짝 벗어나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외적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그 상황이 전부인 양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기쁘면 기쁜대로 어쩔 줄 모르고, 슬프면 슬픈 대로 우울해하고, 건강하면 건강하다고 멋대로 지내고, 아프면 아프다고 의기소침해있고, 칭찬을 들으면 당장 하늘을 날아다닐 것처럼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마음이 떠나 있으면서 그 모든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줄 아는 냉철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