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제가 되고 싶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특히 IMF 금융위기를 지내온 세대들은 재물 만이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자리를 잡았다. 실패했을 때 겪는 고통을 보았거나 자신이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많이 가진 자는 행복하고 남보다 덜 가진 자는 덜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으로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산이 많으면 건강도 지킬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거나 소유하고 싶은 것들을 다 갖을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부자를 꿈꾼다.
하지만 우리 전통에서는 부자는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자이고, 행복은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품에서 온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행동으로 잘 실천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본성에 반하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타적 행동의 밑바탕에는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배려와 마음씨가 깔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더 크고 값진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본능의 샘이 솟구치고 있다. 그것이 선행을 어렵게 만드는 진짜 동기가 아닐까 싶다.
예전 본당에 만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지 못해 안달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칠순이 넘은 할머니인데, 본당의 신자이셨다. 본당신자 중에 그분으로부터 양말 한 켤레라도 얻어 신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누어주는 삶을 사셨다. 한 번은 그분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작은방에 펼쳐져 있는 물건들이었다. 크고 작은 옷과 양말, 장난감들이 가득한 그 방은 선물 진열장 같았다. 방안에 가득한 물건에 대해서 물으니 그분은 가끔씩 남대문 시장에서 도매로 사 온다고 말하셨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물건이었다.
나는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그분의 행복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받은 사람들은 행복하지만, 그 행복은 남에게 무언가를 줌으로써 얻어 가진 그분의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는 사람의 행복은 받는 사람들것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의 서품성구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오 10.8) 이다. 성구를 정했을 때는 나의 삶도 누군가를 위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좀더 많은 것을 나누고 베풀줄 아는 사제로 기억되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