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과 암환자
성당 마당에서 암에 걸린 40대의 남자를 만났다. 병이 한참 진행되어서 대충보기에도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병실이 너무나도 답답해서 잠시 허락을 받고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마당에 있는 성모님은 병원에 오가는 환자들을 위로해주시는 성모님이신 것 같다.
그는 태어나면서 바로 버려져서 어려서부터 천덕꾸러기로 온갖 고생을 하다가 10여 년 전에 착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성실하게 잘 살아왔다고 한다. 아주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낸터라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장사를 해서 그 어렵다는 코로나의 위기도 나름 잘 극복했는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와서 보니 뜻밖에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병원에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 분의 선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든 살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 되어져왔다. 그래서 신자분은 아니지만 안수를 주면서 잘 이겨내실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럴 때 마다 내 마음도 흔들린다. 하느님은 도대체 세상을 불공평하게 운영하시는 것일까? 우리의 4대 교리 중에 ‘권선징악’ ‘상선벌악’을 제대로 지켜주시는 것이기는 할까?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부잣집에서 태어나 손에 흙 한번 안 묻히고 편안하게 호강하며 살다가 가는데 누구는 왜 저렇게 날 때부터 지금까지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 왔다갔다 하는가?
그 분의 말씀 중에 자신은 지은 죄가 많아서 하느님을 안 믿었지만 착하신 신부님께서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신지를 꼭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하느님은 제가 물어봐도 한 번도 답을 해주신 적이 없어요.
만일 죽음으로써 사람의 모든 것이 끝나고 만다면, 바라고 원했던 그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 끝난다면, 정말이지 억울한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누구는 수천억 원을 가지고 온갖 세상의 즐거움을 다 누리는데 누구는 단돈 몇 천 원을 아끼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끝이라면 너무나도 억울하고 불공평하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만약 죽은 후의 삶이 있지 않다면 이 세상의 부조리와 이 세상의 불공평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다. 하느님이 이런 세상을 창조하셨을 리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의 삶, 즉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부활은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죽은 후의 삶을 확실히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신앙이 결정 된다고 본다. 열심한 신앙인이라도 죽은 후의 삶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죽은 후의 삶에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살면서 딱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예수님은 부활은 있다고 가르쳐주셨고 손수 그 약속을 제자들 앞에게 보여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