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피정을 마치면서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4-09-10 02:48 조회수 : 90

피정을 마치면서


힘들다고 생각이 들 때면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점에서만 풍겨 오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수많은 책 안에는 작가와 편집자, 디자이너 그리고 마케터들의 수고로움과 열정을 담겨저 있고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손짓을 한다. 요즘에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들은 어떤 것이지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서가에 꽂혀 점점 잊혀지고 있는 책은 뭐가 있는지 스윽 둘러보곤 한다.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와닿는 책 제목과 내용이 수시로 달라진다. 


표지와 제목을 훑어보고 어떤 책일지 짐작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표지를 열고 작가의 생각과 말을 들여다본다. 진심이 묻어나온 책이라는 생각이 들면 주저없이 구매한다. 힘든 상황에서 마음에 와닿는 책은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같고 그 책을 펼치면 나와 비슷한 마음과 감정이 느껴지고, 그래서 그 안에서 동지애를 느낀다. 마치도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사람의 생각이 온전히 와닿아서 그런 걸까. 유독 어떤 한 구절에 아련한 감정이 느껴지고, 어떤 구절은 너무 아련해서 꼭 쓰다듬어주고 싶을 때도 있다. 


나의 하루도 그렇다. 눈에 아른거려 그저 쓰다듬어주고 싶을 때가 있는 특별한 날이 있다. 피정을 하면서 진심으로, 내 모든 걸 다해 한 명의 사제로, 인간으로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에게 있어서 잘 사는 삶이란 자신만의 굳은 의지나 신념을 지니고, 생각이 말로 이어지고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삶이라는 것을 가슴에 담았다. 그런데 요즘은 개인적인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런지 쓰고 있는 말과 글뿐만 여러 측면에서 비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비어있으면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더 많이, 더 크게 반응하게 되기 마련이다. 내 속이 텅텅 비어있는 깡통처럼 바깥에서 전해오는 자극에 의해 울리는 소리는 계속 커지고만 있었다.


그동안 채워 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장 싫어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어쩔 수 없이’, ‘상황이 그래서’ 그랬다. 몇 년이 안 돼서 나를 채우고 있던 주변의 사람이 꽤 많이 떠나갔고, 그 과정 안에서 생긴 수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신앙심까지 잡을 겨를도 없이 그렇게 날 떠나갔다. 이 정도라면, 누구도 만나기 싫지만 그럼에도 난 누군갈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했다. 만나서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이 나를 그렇게 한 구석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슬펐다. 내 마음이 이 정도뿐이었다는 사실과 내 관계가 이만큼의 깊이 밖에 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또 슬펐다. 나는 그저 그냥 잘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마음은 늘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난 내 마음의 상처에 위로라는 연고를 스스로 바르고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