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지 못하는 꽃씨
국민학교 3학년 때 들었던 이야기이니 벌써 50년도 훨씬 더 됐다. 성함도 가물가물한 담임 선생님은 여성이었는데 상당히 괄괄하셨다. 서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촌도 아닌 아주 애매한 서울 변두리로 발령받아 오셨지만 늘 밝으셨다. 대개의 선생님들은 서울 도심이 아니라 변두리로 오시면 실망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기에 그 선생님은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다.
어느 이른 봄에 교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내린 눈이 점심시간이 가까올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이미 교실은 난로를 철수를 해서 떨면서 수업을 했고, 그리고 집에 갈 생각과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할 생각에 교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책을 펴놓고 수업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책을 덮으라고 하시면서 서양의 옛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아직까지 내 귓가에 선명하게 내용이 남아있다. 선생님의 이야기의 주제는 꽃씨이지만 영원히 꽃을 피우지 못하는 꽃씨였다.
옛날 유럽에 어느 자그마한 나라가 있었다. 왕이 죽자 젊은 왕자가 왕이 되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젊은 왕은 백성들이 정직한 마음으로 살기를 원했다. 모든 백성들이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야만 나라가 평화롭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 나라의 백성이 얼마나 정직한가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대책을 세워서 백성을 슬기롭게 다스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왕궁을 떠나서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왕은 국민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꽃씨를 나누어주면서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백성에게는 상으로 금은 보화를 내릴 것을 약속했다. 그러면서 그 꽃씨의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백성들은 상금을 받을 마음에 들떠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받아갔다. 그리고는 꽃씨를 심고 열심히 가꾸어갔다.
이윽고 꽃이 필 무렵이 되자 왕은 다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제 각기 들고 나온 아름답고 향기 그윽한 꽃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하나 같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아름다운 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을 보면 볼수록 젊은 왕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 왕은 한 소녀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젊은 왕은 그 소녀 앞에 서서 울고 있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소녀는 아무리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하여 돌봤으나 자기 마음이 곱지 않아서 그런지 꽃씨는 꽃커녕 싹도 보이지 않아 상금을 못 받을 것 같아서 운다는 것이었다.
젊은 왕은 비로소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이 소녀에게 상금을 내리겠다.”
꽃을 피우지 못한 소녀에게 상금을 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왕이 나눠준 모든 꽃씨는 소금물에 한참을 담갔다가 꺼낸 것이라서 꽃을 피울 수 없는 죽은 씨였던 것이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상금을 받을 욕심에 새로운 꽃씨를 구해다가 꽃을 피웠던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비록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정직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면서 과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서 나는 얼마나 정직한 사제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