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보다는 행복
잔디밭 어느 한 구석에는 토끼풀이라고도 하는 클로버가 자리잡곤한다. 사람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네잎클로버를 찾으려고 한다. 이유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널려있는 세잎 클로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세잎 클로버의 말뜻이 행복이다.
생활 안에서 로또 같은 복권이 잘팔리고 비슷한 종류의 복권이 많은 것을 보면 사람들의 심리 안에는 행복도 좋지만 금전적인 행운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지 않고, 더 가져야 행복하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더 기대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아무리 어쩌다 오는 행운보다는 행복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해도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역사를 보면 왕에게 바른말을 잘하는 충신들의 말로는 대개가 비참했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간신들이 주변에 많을수록 충언은 더 귀에 거슬린다. 결국 간신들의 모함을 받거나 왕의 심기를 건드려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가서 쓸쓸히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거스르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편해한다. 이처럼 사람은 한번 생각이 굳어지면 여간해서 그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특히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남들이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태도를 회개와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자주 곡해한다.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는 불가하다.’로 받아들인다.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맞는 이야기도 아니다.
‘회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 ‘메타노이아’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마음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생각해서 사후에나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하셨다. 이 말은 하느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갈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믿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얻고자 하는 삶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변화의 첫걸음인 믿음은 일종의 도전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겁쟁이가 아니라 전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심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그 선함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믿음의 본질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한 진정한 행복은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 것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맙게 생각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