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아름다운 판결문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2-12-16 08:59 조회수 : 24

한참 전 일이다. 충남 연기군의 한 임대아파트에 칠십대 노인이 한 분 살고 계셨다. 노인은 아내를 잃은 뒤 동네 공사장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힘겹게 지냈다. 지금이야 노인수당이라고 해서 약간의 용돈이라도 나오지만 당시에는 국가로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 막노동 자리마저 ‘늙었다’는 이유로 밀려나게 되자 이제는 성당 봉사단체가 베푸는 무료 급식에 끼니를 의지해야 했다. 소한, 대한의 추위 속에서도 난방은 한 군데밖에 하지 못했고 그것도 밤에만 잠깐 틀며 지냈다.


그런 노인에게 어느 날 견디기 힘들 일이 발생했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퇴거 해달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법 절차를 잘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 중병에 걸린 아내와 함께 이 임대 아파트에 들어올 때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아내를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고 간호하느라 딸이 대신 계약을 해줬는데, 그 딸이 자기 이름으로 계약하고 아버지가 살도록 한 것이 문제였다. 실제 계약자인 딸은 무주택자가 아니므로 집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소송을 제기 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에서 노인은 희망을 되찾았다. 2심 판사는 노인의 손을 들어줬다.

‘....계약은 딸 명의로 맺었지만, 이는 병든 아내의 수발을 위해 자리를 뜨지 못한 피고를 대신해 딸이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법 지식 부족으로 벌어진 실수로 판단된다. 피고는 이 주택 임차를 위해 본인의 돈으로 보증금을 내고, 실제로 이 주택에 살았다. 피고는 사회적 통념상 실질적인 임차인을 충분히 생각될 수 있으니, 법적으로 임차인으로 보는 것이 공익적 목적과 계획이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법조문으로만 따지면 노인은 설 곳이 없었다. 그러나 판결문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 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한다.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접한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판결문을 살펴보았다. 냉정한 판결이 앞서는 법원 안에서 뜻밖의 판결과 온기를 담고 있는 판결문은 그동안 내가 법원에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해소해 주었다. 그 판사가 자신의 판결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가슴 속 깊이 남아있다.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 없이 법 조항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