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바위 하나가 주는 의미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3-01-21 17:34 조회수 : 55

얼마전 오랫만에 절두산 순교 성지를 갔었다. 성당의 아랫 마당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놓여 있다. 이 바위는 원래 충남 아산의 동천리 마을에 있었던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바위를 멀리 성지까지 가지고 와서 귀한 대접을 해주는데는 나름의 사유가 있다. 그 바위는 병인박해 때에 순교하신 세 분의 외국인 사제와 관련이 있다. 


1866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병인교난이라고 불리우는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다. 오마트르와 위엘 그리고 다빌리 이 세 분의 외국인 신부님은 숨어서 전교하던 중 충청지방의 내포에서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때의 신부님들의 나이가 다빌리 부주교님은 우리나라에 온지 스물 한 해가 되어 마흔 여덟이었고 오마트르 신부님은 입국하신지 두 해가 되었고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그리고 위엥 신부님은 겨우 여덟 달밖에 안됐고 나이는 서른 살이었던 것이다. 다빌라 부주교님을 제외하고는 두 신부님 모두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이였다. 이 세 분의 신부님들은 충남 보령까지 끌려가서 참수형을 당하셨다. 이때 신부님들과 함께 자청해서 순교한 신자가 있었는데 한분은 황석두이고 또 한 분은 장기주이다. 


그럼 절두산 성당의 앞마당을 차지한 바위가 세 분의 신부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궁금해진다. 신부님들이 형장으로 가는 도중 그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다가 간 것이 관계의 전부이다. 한참 기대를 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별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외국 신부님이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닌 세 분의 신부님이 한꺼번에 참수형을 당했다는 것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도 드문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들이 잡혀서 끌려 가다가 잠시 앉아서 쉬었다가 간 바위가 기념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박해가 심했던 무렵인 만큼 그들은 유품마저 남길 기회조차도 없었다. 어쩌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간직하여 전해 줄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분들이 잠시 앉았던 한 덩어리의 바위는 기념이 될 의미와 가치가 충분히 있다. 


특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가슴 뭉클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이때의 세 신부님들의 모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마치 나들이 가는 사람들처럼 태연했었다고 기록에 남겨져 있다.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믿음을 전교하러 가는 듯한 그분들의 의지와 행동은 당시 포졸들 눈에서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분들은 그 바위에 앉아서 앞으로 닥칠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기보다는 그분들이 가고 난 후의 이 땅의 신앙을 더 염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태연했던 그 모습들은 바위보다 더 굳은 그분들의 하느님 사랑을 말해 주는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