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
요즘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한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은 수면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공부에만 매달린다. 그렇다면 요즘 학생들이 같은 길을 걸어온 과거의 학생들에 비해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깊은 역량을 갖고 있느냐?라고 질문을 해오면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을 할 것 같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요즘 들어 공부란 좋은 성적을 받아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각종 자격시험에 붙어서 많은 연봉이 보장되는 대기업이나 관료 사회로 진출하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공부가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도구로 전락하면서 삶에 대한 고민도 인간에 대한 성찰도 사라지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학교 제도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이 시작된 건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전통적으로 전인적 의미를 가지고 있던 공부라는 개념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공부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로 분리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공부하면 출세를 위한 지식을 얻는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생각했던 공부는 지, 정, 의를 모두 갖춘 사람을 만들기 위한 전인적인 공부였다.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공부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여겼다.
아마도 지금처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 놀고 있는 세태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 어느 누구보다 전문 지식을 많이 갖췄어도 인격적인 면에서 지저분한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고위 공직자의 인사 청문회를 보면 짜증이 먼저난다. 웬만한 잘못은 그냥 넘어가줄 정도로 그 정도가 너무나도 심한 경우가 많다. 평생 국가의 권력으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자리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속내를 살펴보면 더 심한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이는 태도는 어떤가? 인간적인 치부가 드러나면 좋은 머리로 적당해 둘러대거나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일삼거나 우기기가 다반사이다.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껴 반성하는 사람을 발견하기 쉽지가 않다. 도대체 공부를 잘한다는게 뭘까? 암기력이 좋고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것 말고 그 무엇을 담보하거나 보증할 수 있을까?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그런 자질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것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공감하고, 남의 처지를 이해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험한 세상 한가운데를 묵묵히 걸어갈 줄 아는 용기와 능력이 암기력이나 현실 적응력보다는 더 귀하고 값진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큰 인격을 위한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하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