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초심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3-05-29 05:06 조회수 : 58

초심 


어제는 첫 부임지였던 상도동성당에서 사목하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러면서 한 분의 신자와의 대화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내 머릿속을 사로 잡고 있는데, 지금도 내게 소중한 만남으로 어떤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에 놀라움을 느낀다. 28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해서 당시의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내가 사목하던 시절만 해도 상도동에는 판자집이 있었다. 비오라는 세례명을 갖고 계셨던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 살고 계셨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형편이 어려운 집이었다. 토굴 같은 곳에 비닐을 쳐서 만든 움막은 머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협소한 집에 살고 계셨는데 젊어서 중풍에 걸리셔서 몸이 많이 불편하셨다. 

그래도 마음은 늘 밝으셨는데 봉성체를 가면 할아버지는 당신이 아껴두었던 믹스 봉지커피를 타놓고는 기다리고 계셨다. 당시에 봉성체를 하던 집이 30여 집 가까이 되어서 바빴지만 그 할아버지 집에서는 금방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다니던 봉사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잠시라도 머물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오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따님은 어디 가셨어요?” 하고 물으니 따님은 공장에 가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할머니는 일용직의 일이 생겨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신다고 하셨다. ‘아픈 사람을 두고 끼니 걱정 때문에 일을 해야만 하다니’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는가, 무엇이라도 돕고 싶었지만 보좌신부라는 직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무력감이 들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 동네 전체가 아파트로 개발이 된다고 결정이 된 상태라서 이 움집마저도 헐리게 된다니 앞으로 할아버지와 가족이 어찌 살아가실까, 하느님은 도대체 계시기는 하신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도동을 떠나기 직전에 한 마지막 봉성체에서 할아버지는 “어제 집을 비워 달라는 세 번째 독촉장을 받았어” 하며 보고하듯 담담하게 말씀을 하시는  차마 나도 이제 사목지를 옮긴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대신에 “할아버지 이제 어떻게 해요?”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아주 담담하게 말씀을 하셨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처음 여기 올 때도 빈손으로 왔으니 떠나야 할 때도 빈손으로 떠나면 되지!”


지금도 비오 할아버지가 가끔씩 생각이 난다. 실로 가진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욱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과 가까이 살아갈 있고 어떤 처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온을 얻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아침이다.


-초심 Level 102023-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