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이의 관심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복잡해지면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졌다고는 하지만 불평등은 심해졌고, 의료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소외당해서 제대로 된 치료조차 기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소외감이 커지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살을 단행한 사람을 두고 위로하기보다는 그 힘든 보릿고개 시절에도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그 시절에 비하면 모든 것이 좋아진 이 시대에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목숨을 스스로 끊느냐고 하면서 쉽게 말하기도 한다.
필요한 지적이지만 한편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를 무심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릿고개 시절은 분명 지금보다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다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지금처럼 상대적 박탈감은 없었다. 예전에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웃집이 끼닛거리가 없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곡식이 떨어진 집은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같은 처지지만 슬그머니 집 앞에 곡식을 가져다 놓는 것이 시골 인심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 있었다. 여러 명의 형제가 한방을 쓰던 그 방 한구석에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든지 ‘형설지공’이라는 표어를 붙여놓고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만약 모든 형제가 학교에 갈 형편이 못되면 장남이나 가장 똑똑한 형제를 위해서 나머지 형제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공부하는 형제를 위해서 어린 나이에 노동이나 돈벌이하는 데에도 크게 불평을 갖지 않고 오히려 공부하는 형제에게 위안을 주기도 했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역설적으로 다 함께 노력하면 그만큼의 결과가 주어지는, 어찌 보면 가난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 속에서 더 깊은 절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 절망의 끝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살이라는 것이다.
하루 평균 50명 가까이 자살한다는 이 시대, 너무 감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한 번쯤은 진지하게 ‘관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특히 교회는 의무감을 느끼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혹시 나도 살기 힘든데,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오지랖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오지랖의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다. 사람에 대한 외면은 항상 끝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먹거리가 떨어지고 공과금이 밀리거나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데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으면 살려는 의욕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사람이 극한의 선택 전에는 “제발 내 손을 잡아주시고, 나를 도와주세요”라는 신호를 은연중에 보낸다고 한다. 우리의 약해진 관심을 다시 연결하지 못하면, 죽음과 절망은 너무나도 쉽게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