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도의 고백
얼마 전에 친구로부터 한 권의 책을 받았다. 몇 년 전에 그 친구의 아버지는 후두암으로 고생하시가 돌아가셨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병상에는 항상 메모하실 종이와 펜을 놓아두셨고 병간호를 하던 아들과 필답을 통해서 대화를 하셨다. 그 필답을 돌아가신 아버지께 헌정하기 위해서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었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북경을 드나들면서 나눈 대화의 방식이라든지, 박해시대에 중국인 사제가 처음 한양에 왔을 때 교우들과 나눈 대화도 같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한자라는 공통된 문자로 대화가 가능했을 거라고 상상을 해보니 세상은 우리가 노력하면 언제든지 항상 열려있다고 생각인 들었다.
며칠 전에 피정을 하면서 본당으로 부임했던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았다.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아쉬움도 많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잘못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누구나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일생을 돌아보면서 반성을 하는 것은 내 영혼의 삶에도 매우 유익하다고 본다. 누구나 돌아보면 잘한 일도 많았지만 이웃과 하느님께 허물을 보여 드린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셨을 때 혼자가 아니라 좌우에 한 사람씩 더 있었다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 알고 있다. 똑같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좌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시오”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반대쪽에 매달린 우도는 그 동료를 꾸짖으며 말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한 이들 두 사형수의 태도가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이 양면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죄인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는 이의 모습이다.
하느님을 우리 생활의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좌도 보다는 우도의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나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늘 우도의 고백을 준비해야 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