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때 묻은 촛불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5-06-02 20:31 조회수 : 71

때 묻은 촛불


어제는 창고를 정리하다가 한구석에서 누렇게 변한 초 하나를 발견했다. 언뜻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작은 노란색 초였는데, 시간이 한참 흘러서 그런지 초 겉면이 세월의 먼지가 변해서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버릴까? 하다가 씻고 칼로 겉을 정리해서 성당 마당의 성모상 앞에서 촛불로 켜서 혼자서 고즈넉하게 묵주기도를 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어두움을 밝혀주는 촛불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촛불을 보니 자연스럽게 차박을 했던 시절이 생각이 났다. 살던 곳이 산골이고 주변에 강이 두 개나 있었기에 시간이 되면 차를 갖고 강 주변에서 차박을 하거나, 시간을 내서 멀리 동해안 바닷가든 강원도산이든 가서 차박을 했었다. 잠은 차에서 간단하게 매트리스를 펼쳐서 잤다. 편하게 숙소를 얻어서 잘 수도 있었지만, 차에서 숙박하면 흔적없이 왔다가 갈 수 있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차박을 하면서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다. 식사는 철저하게 그 주변 식당에서 매식을 했다. 잠은 차에서 자고, 가끔은 커피나 차를 끊여 마셨다. 


해가 떨어지면 실내조명으로는 초를 이용해서 어둠을 밝히곤 했다. 초를 태우면 여러 가지 잡내도 없애주고 무엇보다도 운치가 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면 밤에 호롱불이나 촛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던 추억이 생각나서 좋다.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면 복잡한 마음을 정갈하게 정리해 주기도 한다. 

지금도 가끔은 차를 타고 캠핑을 가고 싶지만, 본당을 책임지고 있어서 갈 수는 없다. 하지만 잠시 눈을 감고 차 안에서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면서 하늘을 처다보았던 모습들을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데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는 초의 모습이 내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로 살면서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지만, 때로는 내가 억울해도 타인의 말을 함부로 옮겨서는 안되는 숙명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달 세수를 하지 않은 아이처럼 까맣게 때가 묻은 초였지만 성모상 앞에 두고 불을 붙이니 멀쩡한 초와 다름없이 힘차게 타오른다. 겉모습이 더러웠을 뿐 조금도 구김살 없는 밝고 아름다운 불빛을 선사해 준다. 때 묻은 겉모습이라서 맑게 타오르는 빛이 이상하리만큼 정감이 더 간다. 초라하고 때묻은 작은 초처럼 우리도 세상을 살다 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가 묻는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졸지에 때가 묻어서 초라해지곤 한다. 하지만 초라한 초라도 심지에 불을 당기면 빛을 내는 것처럼, 때묻은 우리들도 성찰하고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밝게 타오르면서 초가 말없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