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예수님으로부터 불리움 받은 제자들이 그분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보너스로 하느님 나라까지 얻게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생명과 평화, 사랑과 정의, 행복을 얻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였다. 그리고 스승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상경을 결심하자 이제는 뭔가를 보여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잔뜩 가졌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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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승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다시 이 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사악한 자들에 의해서 세례자 요한처럼, 나 역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흐르자, 뭔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절망감이 드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놀라서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 "우리 같은 백성이 하느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구원자를 만났으면 죽음도 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동안 우리들의 노력과 시간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허상을 좇아온 것인가?"
생사는 하느님 손에 달려있으며 만물은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러한 순환은 생명의 최소한의 원리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그분의 말씀, 행동과 기적은 그들이 갖고 있던 상식과는 전혀 달랐다. 죽음으로 보인 것이 하느님께는 죽음이 아니요, 악으로 보인 것이 악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자신들이 행운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램과는 달리 축복의 진열장에는 '죽음'도 '고난'도 같이 진열되어 있다. 좋은 것만 취해질 수 없고 그런 생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누구나 불행과 고통과 병고를 격지 않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내 생각대로 결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런 행위를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의 뜻을 받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지, 하느님이 인간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느님의 의무일 수는 없다."
"나는 반대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일으켜질 것이다."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셨다. 복음서에 이렇게 강조하신 말씀은 이것이 유일하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 넘어 부활의 영생에 이르는 것이니 그 시간 안에 있는 삶과 죽음, 어떤 것에 대해서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에서는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요, 새로운 시작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사순시기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