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성주간과 야누스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4-03-25 04:42 조회수 : 85

성주간과 야누스


어제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을 격렬하게 환영하더니 나뭇가지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사용하는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야누스적인 면을 볼수 있었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출입문의 수호신’으로 출입문을 지키는데 특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사각 지역이 없도록 머리의 앞뒤가 얼굴로 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특히 현대에서는 상반되는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을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된다. 

사실 모든 인간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사라져 가는 얼굴이며, 하나는 남는 얼굴이다. 또 하나는 낡고 누추한 가면의 얼굴이요, 또 하나는 하느님을 닮은 얼굴이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없이 용서를 말하면서도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박애 정신을 말하면서도 희생하지는 않고, 가정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밖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을 쓰고 있다. 또 앞에서는 거룩한 척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상대방을 무차별 공격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이처럼 아쉽게도 인간은 두 개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가진 것이 많이있는 사람들에게서, 남보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두 개의 얼굴은 더 숙달되어 있다.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식이라는 나뭇가지로, 또 재물과 권력이라는 나뭇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때리면서 휘두르고 있다.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엘리엇은 현대인을 박제 인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껍데기는 있으나 알맹이가 없고, 지식은 있으나 진실이 없으며, 재물은 있으나 나눔이 없고, 권력은 있으나 봉사가 없는 인간을 박제 인간이라 표현한 것이다. 내가 예전에 가끔 오르던 산자락에 있는 바위와 숲, 바람과 새 소리들은 그 어느 것도 인간의 두 얼굴처럼 박제된 것이 없는데 유독 사람만은 두 얼굴에 익숙해 있고 박제되어 가고 있다. 


복음에서도 인간의 야누스적인 면이 드러나고 있다. 사랑을 죽이고 진리를 파괴하며 정의를 모욕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랑이고 진리이며 정의이신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이다. 인간의 두 얼굴, 즉 가면과 위선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박제된 인간이 참 인간을 심판한 것이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간사한 인간의 언어가 세상의 구세주를 죽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사라져 가는 얼굴과 남은 얼굴이 있다. 사라져 가는 얼굴이란 세속적인 이기심, 욕심, 교만, 가면의 얼굴이요, 남는 얼굴이란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의 얼굴, 하느님을 닮은 얼굴이어야 한다. 이번 성주간에는 사라져 가는 얼굴을 만들지 말고 남을 있는 얼굴을 만들어보자. 사라져 가는 얼굴이, 그리고 낡고 누추한 가면과 위선의 얼굴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였음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