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부활하게 해주소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열 번이 훌쩍 넘게 하였다. 나는 운좋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무덤 경당 안에서 세 번씩이나 미사를 봉헌하는 영광을 누렸다. 예수님이 잠시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거룩한 장소에는 아주 작은 제대가 있다. 문제는 가톨릭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들이 종일 방문하는 장소이기에 미사를 봉헌을 허락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나마 새벽 5시에서 6시까지만 허용되기에 경쟁률이 엄청나게 심하다. 그래서 그 안에서 미사를 봉헌했을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때의 아름답고 거룩한 미사와 기도의 감동은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온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신부가 되었지만 거룩한 부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의 미사가 추억으로 남아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믿음과 변화의 현장이었던 예수 부활 무덤이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깃거리의 일부분이 되어간다면 분명히 슬픈 일이다. 그런 마음이라면 예수 부활 제대에서 세 번이 아니라 30번, 300번의 미사를 봉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사 봉헌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되고 다시 태어나는 삶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진정한 부활은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는 데 외형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변화의 바탕에는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하고, 어렸을 때부터 탕자의 삶을 살았던 아우구스티노가 성인 주교가 되듯이 마음의 변화가 바탕이 되어야 거룩한 변화기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미움이 사랑으로, 교만이 겸손으로, 불평이 감사로, 불신이 믿음으로 바뀌는 변화다.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되는 삶, 그것은 바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솝 우화 중에 요술쟁이와 생쥐의 이야기가 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서 살았는데 고양이를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생쥐가 불쌍하여 고양이로 변화시켜 주었다. 그랬더니 다시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로 변화시켜 주었는데 다시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호랑이로 변화를 시켜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된 생쥐는 고양이를 만나자 오줌을 싸면서 도망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요술쟁이는 “네가 껍데기만 바뀌었지, 마음은 변화가 되지 않았구나. 다시 생쥐로 돌아가려무나.” 하면서 생쥐로 만들어 버렸다.
부활은 마음이 변화, 생각의 변화이지 껍데기만 바꿔 뒤집어썼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씨앗이 자신을 썩이는 아픔을 통하여 새로운 싹을 틔우듯 나의 부활은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바탕으로 아픔을 통하여 탄생한다. 속을 썩이면서 사랑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용서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그러한 아픔을 통해서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 교만이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 끊임없이 기억나는 미움과 증오라는 무덤에서 나오는 아픔을 통해서 부활은 탄생한다. 변화와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자. 쭈글쭈글한 번데기에서 예쁜 나비가 탄생하듯, 징그러운 굼벵이가 매미로 변하듯, 나의 부활은 자신의 변화요 아픔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살겠다. 그리고 예수님께 기도해본다.
"주님! 저도 부활하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