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양복 5벌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5-08-06 19:30 조회수 : 68

양복 5벌


오늘은 비가 와서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만, 여름이 한창이라서 어쩔 수 없이 옷을 자주 갈아입는다. 오늘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평상시에 입지 않는 옷이 옷장 안에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임지로 갈 때마다 옷을, 정리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오래된 옷은 5벌의 양복이다. 그 양복은 정확하게 30년 전에 부모님께서 맞춰주신 옷이다. 양복을 한꺼번에 맞춘 것도 드문 일이지만 내 성격상 한 벌만 맞추면 그 옷만 입고 다닐 것 같아서 부모님께서 반강제로 한꺼번에 5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하얏트 호텔 양복점에서 맞춰주신 것이다.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이 나면 유행에 뒤진 옷이지만 슬그머니 입고 외출을 하곤 한다. 


난 물건을 사면 오래 쓰는 걸 좋아해서 신발도 10년이 넘는 것도 몇 켤레가 있다. 좋아하는 물건에 애정을 갖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역사를 만드는 경험은 내가 즐기는 삶의 방식이다. 나 역시 자질구레한 인터넷 쇼핑을 하지만 그래도 늘 품고 있는 물건이 몇 가지는 있는데, 그 물건에는 나의 삶의 방식과 역사가 함께 있기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끔은 무식할 정도로 한 물건을 오래 쓸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바꿀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유행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애착템을 가진 사람이다. 오직 나만 알고 있는 사연이 있다면 물건과의 ‘의리’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친하게 지내는 동창 신부가 아이폰 16을 구매했다면서 형도 필요하면 하나 사줄까 하면서 전화가 왔다. 나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지금 쓰고 있는 것도 아직 쓸만해서 당분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 쓰고 있는 것도 4년 전에 다른 동창 신부가 자기 것을 사면서 사준 것이다. 나이가 들지만 변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트렌드에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도 괜찮은데 굳이 새로운 것을 사서 공간만 차지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 나이에는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보다는 갖고 있는 것도 하나씩 정리를 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살다 보면 새로운 것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만의 추억과 역사가 담겨 있는 물건이 훨씬 좋다. 오래전에 선물을 받아서 지금은 조금만 사용하면 쉽게 방전되는 이어폰을 새로 이어폰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익숙해서 편하기도 하지만 선물을 사기 위해서 고심했을 지인의 마음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건은 낡으면 버리게 되지만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이어져 연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새것을 탐하지 않고 지금 갖고 있는, 낡아가는 것에 마음을 있기를 희망한다. 손에 쥐어진 물건에 부디 삶의 서사가 가득하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