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필요성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오늘은 용서에 관해서 물어본다.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고 묻는 제자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단순히 숫자대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완전한 용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숫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용서는 일회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다 보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움이 슬그머니 파고드는 바람과 괴로울 때가 많다. 미움은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그리고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나갈 줄 모른다. 미움과 용서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인다. 미움은 불시에 들어오는 불청객이지만 용서는 끊임없이 초대해도 쉽게 들어오지 않는 낯선 손님 같다는 점이다.
본당을 운영하다 보면 사제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반대하는 분들이 계신다. 신부는 5년만 있으면 가는 사람이지만 자신은 계속 본당에 있을 사람이기에 자신들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분들이다. 나쁜 뜻은 아니지만 본당에 큰일이 생기면 그런 분들의 대다수는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본다. 그러면서 문제는 사제들이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그럴 때마다 심기가 매우 불편하지만 기도한다. 사심 없이 그리고 공개적으로 본당을 운영한다는 원칙 아래에 사목회와 상의를 하면서 진행하고 있기에 본당 신자들이 공감해 주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하시던 분이 교통사고로 다치셨다고 병자성사를 청했다. 순간 가기 싫어서 보좌신부를 보낼지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갔다. 병자성사가 끝나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동안 죄송했다고 말씀하셨다. 죄송한 마음은 진작에 가졌지만, 용기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자신이 사고를 당하고 몸이 장애가 생기니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고백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부끄러웠다. 예수님이 끊임없이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용서는 머릿속에만 자리 잡고 있었다. 용서하는 것만큼 용서를 구하는 마음 또한 커다란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사람들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당연히 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용서를 청하는 것도 용서를 해주는 것도 본능에 역린하는 것이기에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용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한 번 더 해 보았다. 덕분에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미움보다는 내 자신이 미움을 떨쳐 버리지 못한 옹졸함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게 되었다. 이제 성숙한 사제가 되기 위해서 이 옹졸함에서 벗어날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