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7월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미국과의 관세협정을 끝냈다고 여기저기에서 대서특필이 되고 있다. 나는 이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씁쓸했다. 미국과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체결한 FTA 협정이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깨면서 다시 협정을 맺자고 강요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과연 세계의 리더로서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도 그게 현실이라면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요즘 경제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과 언론에서는 경제 상황에 대해서 정신이 없을 만큼 많은 정보를 쏟아낸다. 그런데 그들의 논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경제를 말할 때는 ‘경제의 몰락이 가져올 공포심’을 극대화하면서 노동자의 양보를 강요하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보수정권이 써먹는 방법이다.
그런데 성장과 발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이 다함께 잘 살아야 한다. 국민의 대다수는 자산이 많지 않기에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국가의 정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요즘 그동안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던 정책을 다시 돌아가려 하자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친다. 그러면 기업이 망한다고 경제지와 보수지들이 소리 높여서 합창하고 있다. 그들이 기득권인 특정 계층의 주장에 동참하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유리하기 때문 일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자연스럽게 기득권과 소외당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양극화’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사실 ‘양극화’가 되는 사회는 올바른 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는 빈곤화에 놓여 있거나 놓일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발전하고 성장하는데,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이 갖고 소외된 사람들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교회는 이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등이 상호 불신과 증오, 분쟁과 환난을 일으키며, 인간의 탐욕이 그 원인이며 그와 동시에 희생 제물이 된다고 오랫동안 밝혀왔다. 성경 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이 그들만의 잔치를 위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성전을 꾸미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영화만을 추구한다고 꾸짖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불평등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경제 발전에 의해서 건물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교회는 건전한 비판보다는 시류에 편승을 해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그 안의 수많은 구성원은 중산층 이상만 남고 도움을 필요한 이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초라해지고 그래서 결국은 교회를 떠나는 현실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런 현상들이 지속되면 국가의 장래도 어둡지만 교회의 앞날도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