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짜끼우의 성모님 발현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4-03-11 05:16 조회수 : 144

짜끼우의 성모님 발현


지난 월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새벽까지 베트남의 성모발현지를 다녀왔다. 첫날은 짜끼우의 성모님 발현지를 둘째 날은 옛 수도인 후에의 티엔 안 베네딕도 수도원을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라방의 성모님 발현지를 방문해서 미사와 기도를 봉헌했다. 오늘은 첫날에 방문했던  짜끼우 성모님 발현지를 소개를 하고자 한다. 


베트남의 가톨릭은 1533년 유럽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시아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겪었다. 특히 베트남에는 53차례의 크고 작은 박해가 있었고 희생된 신앙인의 숫자만해도 17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프랑스가 자국의 선교사들의 희생을 핑계로 1862년 침략했고, 1883년에 식민지화에 성공하면서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그러나 투덕왕이 죽은 후 1884년 젊은 함응이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왕권지지운동이 전개되었고, 많은 관료들과 지식인들이 ‘서구세력과 잘못된 종교의 파괴’라는 비밀구호 아래 프랑스의 보호를 받고 있던 베트남 가톨릭을 공격하였다. 


베트남 옛수도 후에의 남쪽 꽝남 지방에 짜끼우라는 작은마을에 약 900명의 신자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박해의 물결이 한창인 1885년 9월 1일, 이 작은 성당에 반탄(Van Than)의 군인들이 성당을 공격하려고 사방을 포위했다. 신자들은 무장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3분의 1밖에 안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본당 브루이에레 신부님은 신자들을 모아놓고 탁자위에 성모상과 양쪽에 촛불을 켜고 성모님께서 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싸우러 나간동안 노인, 여자,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성모송을 암송하고 있었다. 

몇 일간 극렬한 저항에 묶인 반탄의 군인들은 최후수단으로 성당이 잘보이는 언덕에 대포를 끌고 와서 발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탄의 모든 대포들이 맞추기 쉬운 표적을 빗나가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병장교에 의하면 성당 꼭대기에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았다. 그 여인은 2일 동안 성당 꼭대기에 서 있었으며, 군인들은 성당과 그 여인을 맞추고자 했으나, 결코 맞출 수 없었다.


그러나 반탄의 군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성당을 공격하기 위해서 9월 21일 코끼리부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성당 꼭대기에는 여전히 흰옷을 입은 여인이 서있었고, 희고, 빨간 옷을 입은 천여명의 아이들이 대나무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향해 행진해오는 것을 보고는 코끼리들이 겁에 질려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이를 본 반탄 군인들도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고 한다. 베트남 가톨릭교회는 보잘것없는 무기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무사했던 것은 성모님의 도움 덕분이라고 발표하였다. 1898년 짜끼우에 새로운 성당을 건축하고는 ‘믿는 자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우리는 대포를 쏘던 언덕에 세워진 자그마한 야외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대포를 쏘던 죽음의 언덕이 성모님과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는 거룩한 은총의 장소로 바뀌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혹여 잘못된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삶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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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이 발현하신 짜끼우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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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끼우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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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현당시에 성당에 모셔진 성모상과 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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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끼우성당에 발현하신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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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를 쏘던 자리에 세워진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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