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혼자지만
나는 선물을 받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서품성구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로 정했다. 가끔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이걸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 때마다 구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로도 내 스스로가 행복해진다. 특히 간절히 찾고 있는데 어디서 구입을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내가 사서 선물을 주면 아마도 그 기쁨은 상대방에게는 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좋은 책을 발견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최근에 산책을 하다가 들른 서점에서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을 발견했다. 작가도 책도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마치도 들꽃 같은 풋풋한 느낌을 갖고 있어서 나는 좋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엘제아르 부피에’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서 묵묵히 혼자 사는 양치기였다. 부인과 딸을 잃고 혼자서 사는 ‘부피에’는 누구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의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 안타까워서 어느 날부터 엄지손가락 굵기의 쇠막대기로 땅을 파서 도토리를 지속적으로 심었다. 그런데 그가 정성껏 도토리를 심었던 땅이 놀랍게도 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는 땅 주인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떡갈나무가 울창해지를 바라면서 아주 정성스럽게 도토리를 심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는 황무지에 도토리 10만개를 심었고, 그 중 2만 개의 도토리에서 싹이 나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지 일체 말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고, 혹시라도 누가 물어보면 서른 해가 지나면 떡갈나무들이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대답을 하곤 했다.
그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하던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한참 지나서 황무지가 아름다운 떡갈나무 숲으로 변했을 때 사람들이 그 숲에 찾아와 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부피에’는 단 한 번도 그 숲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하거나 소유를 주장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이미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배운 것 하나 없는 늙은 양치기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그는 늙고 병들어서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감을 감았지만 그가 심었던 도토리가 만들어 낸 떡갈나무 숲은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놓았다.
이 동화가 전해주는 교훈은 다양할 수 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비록 작은 한 개인이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았다. 어제 글에 쓴것처럼 '나 하나쯤이야' 보다는 '비록 혼자지만'의 정신이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이자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바꿔 나가는 힘이 훨씬 크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참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한다. 누군가 말했던 ‘양치기가 책을 보지 않는 건, 책보다 양에게서 배우는 게 더 많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처럼 '엘제아르 부피에'는 머리와 입으로만 떠드는 대신 행동으로 그걸 고스란히 삶으로 보여주었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비록 소설속의 인물이지만 나도 세상의 빛과 희망을 가져다 주는 사제로 살고 싶기에 '부피에'가 걸었던 '겨우 나 하나가'그 길을 따라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