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다. 대림동 본당신부로 부임한 이후로 시작한 카페에서 커피와 차를 직접 만들어서 나눔을 아직도 하고 있다. 성당에서 미사만 참례하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시는 신자들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벌써 1년 반 이상이 지났고 나름 정착이 되어서 미사 후에도 성당에 머무르다 가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나름 보람을 느낀다. 커피를 직접 내려서 나눔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해온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한 것은 신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약해질 때마다 성체조배를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깨달으려고 노력했고, 그 느낀 것을 실천하려고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사제에 대한 기대치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점잖고 품위 있고 때로는 거룩해 보이는 신부를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난 학교를 떠나서 본당으로 발령 받게 될 것이라고 교구장으로부터 통보를 받았을 때 고민했었다. 본당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서 내린 나름의 결론은 신자들의 이야길 많이 들어주고 웃으면서 다가가고 하루에 적어도 1시간 이상의 성체조배와 기도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예수 성심을 보여주는 사제가 될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다.
요즘 나의 모습은 동네 아저씨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모습이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사제의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삶을 통해서 신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습 속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반면에 율법학자들은 성서를 거의 완벽하게 외우고 율법의 모든 조항을 꿰차고 있었지만 자만심이 가득했고 그런 자세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정적인 단점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삶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권위는 단순히 아는 것을 가르치는데서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권위가 서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셨고 사랑의 삶을 사신 분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때로는 사목자에게도 권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사제로써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따르는 예수성심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가르치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설령 사목자가 많은 업적을 이루더라도 교우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도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뜨거운 가슴을 갖고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갖고 신자들을 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