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편 기도생활] 제 1장 - 신자가정에 비치해야 할 성물 |
제1절 비치해야 할 성물
사제의 축복을 받아 성별(聖別)된 것이나 그 자체로서 거룩한 것을 성물이라 한다. 신자 가정에 비치해야 할 성물은 다음과 같다.
성 서(聖書)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편지'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계신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때이고, 우리가 기도할 때는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때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우리는 성서를 가까이 두고 매일 읽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1편 3장 참고].
가톨릭기도서 기도서는 우리의 공동기도를 가능하게 하고,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며, 주님께 대한 애정을 일깨워 준다. 함께 기도할 때,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주님께 대한 정이 메마를 때 기도서를 사용하면 좋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린이의 몫까지 준비하여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
미사경본 미사경본에는 주일미사, 축일미사, 평일미사, 신심미사, 성사미사, 기원미사, 위령미사, 특별미사 등에 바치는 고유한 기도문이 실려 있다. 미사는 사제와 신자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 기원과 속죄의 제사이므로 사제만이 바치는 부분과 신자가 바쳐야 할 부분이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미사경본을 보면서 사제와 함께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 요즈음에는 ‘매일미사'라는 이름으로 매월 끊어서 발행되고 있다.
성가책(聖歌冊) 성가는 우리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아름다운 목소리로 더 열정적으로, 더 장엄하게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혼자서 성가를 노래함도 좋으나 여럿이 모여 기도할 때, 함께 성가를 부름은 공동체 정신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서와 함께 성가집을 둠이 바람직하다.
가톨릭교리서 교리서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알고 또 실천해야 하는 진리를 요약한 책이다. 여러 가지 교리서가 있으므로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단계적으로 구입하여 읽는 것이 좋다. 영세한 지 오래된 신자일수록 계속 공부하여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자녀들이나 이웃을 가르쳐야 한다. 더욱이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을 다져가고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 년에 한 권의 교리서를 읽고 재충전하도록 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황청이 직접 펴낸 책으로서 교리 교육하는 사목자들의 규범서이고, 무궁 무진한 교리를 더 깊이 깨닫고자 하는 모든 신자들과 가톨릭 교회를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발간한 책이다.
십자고상 십자고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희생제물로 드리시는 모습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심을 드러낸다. 우리는 십자고상을 모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신다. 우리는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구하며,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제의 축복(祝福)을 받은 십자고상을 가족이 모이는 방이나 거실의 벽에 걸거나 탁상 위에 모시는 것이 좋으며, 방마다 모시면 더욱 좋다. 되도록 품위있는 십자고상을 모시도록 하고, 가끔 손질하여 깨끗이 보존하며, 기도할 때나 묵상할 때에는 이 십자고상 앞에서 한다.
성모상(聖母像)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다(요한 19,26 참고). 그러므로 우리가 성모 마리아상을 모시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성모상을 모실 때에는 사제의 축복을 받는 것이 좋고, 벽에 모신 십자고상 아래나 탁상 위에 모신 십자고상 옆에 모신다.
성화(聖畵, 像本)와 성상 예수님의 상[예수 성심상]과 함께 가족의 주보성인들의 성상이나 상본도 모실 수 있으나 십자고상이 항상 중심이 되어야 한다. 신자가정에 성상이나 성화가 모셔져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임을 드러내는 무언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성물이 파손되었을 때는 축복도 무효가 된다. 태울 수 있는 것은 태우고 그렇지 않으면 땅에 묻는 것이 좋다. 상본은 축복을 받지 않는다.
묵 주(默珠) 묵주를 ‘로사리오'라고도 하며, 로사리오란 장미꽃 다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장미로 엮은 꽃관을 성모 마리아께 드린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묵주기도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구원의 역사를 묵상하면서 성모님께 우리의 성화(聖化)와 이에 필요한 은혜를 전구(轉求)해 주시도록 비는 기도이다. 특히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신자들이 열심히 그리고 자주 바치도록 권하신 기도이다. 그러므로 자주 묵주기도를 할 수 있도록 묵주를 잘 보이는 곳에 두거나 지니고 다니는 것이 좋다. 묵주는 사제에게 축복을 받아 사용한다.
성 수(聖水) 성수는 영원한 생명과 죄의 씻음, 즉 세례성사의 은총을 상징하고 죽음의 세력을 멀리하게 해 준다. 교회는 부활성야의 예식 중에 물을 축복하여 나눈다. 각 가정에서는 이 성수를 조금씩 준비하였다가 기도할 때나 환자가 생겼을 때, 특히 임종 전후에 이를 뿌려 악의 세력을 멀리하게 한다. 성수를 사용할 때는 통회하고 세례의 은총을 기억한다.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성호경을 그으며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한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아멘.” 또는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하고 기도한다. 이것은 자기 죄를 씻고 성전(聖殿)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올 때는 성수를 찍지 않는다.
성 초 밀초는 수천 마리의 벌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 교부들은 벌들이 동정성과 단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동정녀 성모 마리아와 교회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래서 성초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탄생한 예수의 몸을 상징하며, 아울러 스스로를 태워 빛과 열을 내므로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온 가족이 모여 기도할 때, 특히 환자와 함께 기도할 때, 위령기도와 초상 때 이 초를 켜고 영원한 빛의 근원이시며 그 빛의 전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광명으로 밝혀주시기를 기도한다. 교회는 주님의 봉헌 축일[2월 2일]에 초를 축복하고 나눈다. 이때 초를 축복 받지 못했을 경우 개별적으로 사제에게 축복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
성 지(聖枝) 성지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리스도 왕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표시한다. 교회는 4세기부터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활 전 주일]에 푸른 나뭇가지를 축복하여 나눈다. 우리가 성지를 받는 것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우리도 주님을 따라 십자가와 부활 신비[파스카 신비]를 자신 안에 구현하겠다는 신앙고백이다. 성지주일 전례 중에 받은 성지는 집에 모셔둔 십자고상과 함께 두고,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을 묵상하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것을 다짐한다. 성지는 재의 수요일 전 주일에 본당에서 모아 ‘재의 수요일' 전례를 위해 준비한다. 만일 그때까지 본당에 보내지 못하였으면 재의 수요일 이후에 집에서 정중히 태워 없앤다.
기도상(祈禱床) 가정에서도 작은 상을 마련하여 흰 보로 덮고 그 위에 십자고상, 성모상, 성초, 성수, 성서, 묵주 등을 얹어 놓고 꽃으로 장식하는 등 정성을 드리면서 언제나 우리 가정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바람직 하다.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이 기도상을 중심으로 모인다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더 잘 느끼게 되고, 온 가족이 보다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
| [제 1편 기도생활] 제2장 - 하루의 생활 |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또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의 하루를 영원한 세계로 연결지으며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이 되게 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이”(2베드 3,8) 느끼며 뜻있는 삶을 항구히 살아야 한다.
제1절 기상과 몸단장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제일 좋은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계획하여 어느 시간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살펴 시간 배분을 잘 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비능률적인 시간 배정은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에, 같은 시간을 살았다 하더라도 인생을 짧게 사는 결과를 초래한다. “게으른 사람은 손 하나 까딱 않고 포부만 키우다 죽는다”(잠언 21,25)는 말씀처럼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일찍 일어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항상 여유있게 살지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항상 바쁘게 산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건강하여 의욕에 찬 생활을 할 수 있으나,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늘 피곤한 기색으로 살게 마련이다. 따라서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맑은 머리와 상쾌한 마음으로 살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흐릿한 머리와 조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아침에는 머리가 맑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어 무엇인가 생각하고 일을 계획하기 좋다. 일찍 일어나서 몇 분 만이라도 아침기도를 하고 10분 내지 20분 정도의 묵상시간을 가지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묵상은 우리의 정서와 일상생활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더 여유가 있으면 평일미사에도 참여하여 신심생활을 새롭게 함이 바람직하다.
적당한 화장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는 그 사람 내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배우자나 자녀들에게라 할지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혐오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즉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손질하도록 한다. 남자는 면도를 하고 여자는 화장을 하는 등 몸차림을 단정히 해야 한다. 이것은 멋을 부리기 보다는 남에게 자신을 보이는 예의이다. 화장은 외모를 단정하게 하면서 자신의 내면도 가다듬게 한다. 그러나 지나친 화장은 하느님께서 주신 원래의 아름다움을 감추어버리고 오히려 이웃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더욱 돋보이게 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단정한 옷차림 옷은 추위와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몸을 가리는 수단이지만 인간의 자연미나 품위를 보존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활동하고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면서 산다. 우리는 결코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서 있는 마네킹이 아니기에 미적 감각에만 치우쳐 인간의 노동이나 활동을 고려하지 않은 옷의 선택은 삼가함이 좋다. 성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자들은 정숙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머리를 지나치게 꾸미거나 금이나 진주로 치장을 하거나 비싼 옷을 입지 말고 오직 착한 행실로써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어울립니다”(1디모 2,9-10).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듯한 옷차림이나 흐트러지고 불결한 옷차림을 해서는 안 된다. 근래에 와서는 나체에 가깝도록 지나치게 노출시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려는 사람들도 있다. 죄의 결과인 수치를 잊은 듯하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기보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답게 또 가장 품위있게 자신을 꾸미는 차림인가에 대해 마음을 써야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아름다운 유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평화를 간직하고, 진실을 찾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이 바탕을 이루어야만 화장도 곱게 보이고 옷도 품위있어 보인다. 같은 옷이지만 마네킹에 입힌 것과 사람이 입는 것이 다르고, 나아가서 입은 사람에 따라 품격이 달라지는 이유를 생각해야 하겠다. |
| [제 1편 기도생활] 제3장 - 말씀과 함께 사는 생활 |
사랑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계획과 뜻을 밝혀 주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 수 있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잘 들려올 때, 우리 안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피어날 것이다. 하루의 일과 중에 성서를 대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제1절 계 시(啓示)
하느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뜻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혀 주심으로써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나아가게 되었고, 하느님의 신성(神性)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마치 사랑하는 벗을 대하듯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출애 33,11; 요한 15,14-15), 인간과 사귀면서(바룩 3,38) 인간을 당신께로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여러 가지 방법, 즉 자연, 성조들, 판관들, 예언자들을 통하여 가르치시다가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히브 1,2), 그 아드님은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요한 3,34)이시고,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4,9 참고)이라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과 업적 그리고 기적으로써 특별히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계시하시고, 마침내 ‘진리의 성령'(요한 14,16)을 보내심으로써 하느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 어떠한 새로운 공적(公的)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계시 4)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포하였다.
성서(聖書)와 성전(聖傳)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계시'하신 것이 영구히 그리고 온전히 전해지도록 계획하셨고 이를 기록하도록 배려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는 사도들을 통하여 또 후계자들을 통하여 전해지다가 그 일부분은 성령의 영감(靈感)을 받아 기록되었다. 이것을 성서라고 한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 또한 전래(傳來)되고 있다. 이것은 다음 성서 말씀으로 알 수 있다.
구약에서:“너희 아비에게 물어 보아라. 그가 가르쳐 주리라. 노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일러 주리라”(신명 32,7). “하느님, 우리는 두 귀로 들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조들이 살던 시대 그 옛날에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들었습니다”(시편 44,1). 신약에서:“예수께서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요한 21,25). “우리가 전한 말이나 써보낸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데살 2,15).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며, 성전은 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말씀이다”(계시 9). 사도들은 위탁된 하느님의 말씀을 후계자들에게 전해 주었고, 후계자들은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충실히 보존하고 설명하며 널리 전해왔다. 이러한 성전과 성서는 똑같이 하느님의 계시이고,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교회의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며 성실히 진술하고, 또한 하느님의 계시로 믿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서와 교회의 교도권은 하느님의 현명하신 계획에 의하여,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성립할 수 없고,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또한 각각 고유한 방법으로 한 성령의 작용 아래 ?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계시 10).
〈 우리의 생활 〉 우리는 말씀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믿음의 복종'(로마 16,26)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계시에 따라 살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시고 믿는 즐거움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내적 도우심을 빌어야 하겠다. |
| [제 1편 기도생활] 제4장 - 기도하는 생활 |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며, 기도한다는 것은 신자의 표시이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용서를 청하고, 필요한 은총을 구하며 하느님께 사랑을 드린다. 우리의 생애 전체가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해서는 생활 자체는 물론이요 하느님께 향한 마음을 기도로써 표현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야 한다.
제1절 기본기도
우리가 드리는 많은 기도 중에서 우리의 신망애 삼덕을 길러주는 기본 기도가 있다. 가톨릭 기도서에 여러 가지 기도가 수록되어 있지만 여기에서 설명하는 기도는 신자의 기본 기도이므로 자주 드림으로써 주님과의 일치를 돈독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암송할 수 있어야 한다.
성호경(聖號經)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경은 매우 짧은 기도문이지만 가장 자주 하는 기도이다. 입과 손과 마음, 즉 나의 온 존재로서 신앙의 근원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고백하고 구원의 도구인 십자가를 표시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서 은총을 비는 기도이다. 손으로 이마와 가슴과 양 어깨를 짚어가면서 몸에 구원의 십자가 표시를 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내 몸에 표시함은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께 드러내는 것이다. 입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라고 함은 계시된 모든 교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교리를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름으로' 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의지하여 행한다는 뜻이다. 결코 나를 위하여, 나 혼자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멘'은 ‘굳은, 확실한,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이란 뜻을 지니며 기도문 끝에 붙여 그 기도문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강조한다. 손으로 머리를 짚는 것은 내 모든 지혜를 다하고, 가슴을 짚음은 내 모든 정성을 다하고, 양 어깨를 짚음은 내 모든 힘을 다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한다는 뜻이다.
로마 전례에 따라 성호경을 제대로 염하고 십자표시를 긋자면, 먼저 왼손을 펴서 가슴에 얹고, ‘성부와' 하면서 오른손으로 이마[온 우주의 주이시며 지혜이신 성부를 가리킴]를 짚고, ‘성자와' 하면서 가슴[사람이 되시어 사랑을 가르치신 성자를 가리킴]를 짚고, ‘성령의' 하면서 양 어깨[은총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힘이신 성령을 가리킴]를 짚은 다음, 양 손을 합장하며 ‘이름으로. 아멘' 한다. 이때 합장한 두 손의 끝은 약간(45도) 하늘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 엄지를 왼손 엄지 위에 얹어 십자형(+)이 되도록 한다.
영광송(榮光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 모든 능력의 근원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천사와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는 모든 존재와 모든 행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이 범죄하고 있기에 하느님의 영광에 손상을 끼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르쳐 주고 그 신비로 초대해 주셨으니, 성삼위께 영광을 드림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 후에나 일상생활을 포함한 온갖 활동 후 영광송을 드리기를 권한다. 특히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다음 영광송을 바친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영원히 영광 받으시기를 기원하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렇게 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미사 때에는 대영광송과 전문(典文)의 마지막 부분[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으로써 하느님께 우리 모두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 복음 전에는 “주님, 영광받으소서”라고 하며 그분의 영광을 구하고, 성찬식에서는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권능과 절대성을 찬양한다.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에 ‘주님의 기도'라 하며(마태 6,9-13; 루가 11,2-4), 그 안에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 즉 복음이 명백하게 포괄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공동체[그리스도인들]의 근본 이념과 염원이 표현되어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세례받은 자의 특권으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바치게 하였다.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으로 시작된다. 호칭에 따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께서 친히 발음하신 아라메아어로 ‘아빠'라고 하셨는데 아라메아어의 ‘아빠(Abba)'는 젖먹이가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아무도 일찍이 하느님을 감히 아빠라 부르지 못했지만 예수께서는 즐겨 아빠라 부르셨고,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신 이 특권을 우리도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기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친아들로서 당신의 품위에 참여하라는 뜻으로, 또 어린아이처럼 아버지께 신뢰하고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느끼며 친밀하게 대화하라는 뜻으로 ‘아빠'라 부르게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또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일곱 가지 청원'을 드리는데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후반부의 네 가지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전반부는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으나 실은 ‘아버지의 영광'을 비는 것 하나로 요약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개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를 통해 세말에 완성된다. 그러므로 우선 나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내 안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도록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악의 노예가 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왕권이 하루 빨리 내림하기를 빈다. 즉 하느님의 구세사업이 빨리 완성되어 만천하에 밝히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구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즉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청하는 것이다. 결코 부자되기를 욕심내지도 않고 곤궁을 원하지도 않으며 ‘아빠, 아버지'를 신뢰하고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섭리를 기다리는 의탁의 자세이다. ‘일용할 양식'이란 끼니에 필요한 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영혼의 빵[성체]까지를 가리킨다. 그래서 영성체 전에 반드시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일용할 양식을 부탁하는 청원에는 우리 삶 구석구석에까지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이 스며들어 하느님의 참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영적 물질적 은혜를 청하는 간구가 들어있다.
둘째, ‘죄의 용서'를 빈다. 우리 구원의 첫째 조건이 하느님의 용서이다.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새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시대, 즉 용서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우리가 받은 용서를 이웃에게도 베풀 줄 아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이웃을 용서할 용의가 없는 사람은 자기 잘못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빌 자격이 없고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아빠, 아버지'께 당연히 용서를 청하며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마련하신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셋째, 아버지의 관계를 파괴하는 죄의 전조인 ‘유혹에 빠지지' 않는 은총을 구한다. 즉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기를 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유혹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비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유혹이 없을 수는 없지만 유혹에 떨어져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끝맺는데 이는 모든 악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비는 불안한 어린 자녀의 간구이다. 진리와 행실을 그르치지 않으며 육체적 재앙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기를 비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유혹과 악의 세력 앞에서 움츠려들 까닭이 없다.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영광을 드러내시며 생명의 빵과 용서를 베푸시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소리높여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미사 때 ‘주님의 기도'의 응송] 하며 마음껏 노래하자.
성모송(聖母頌 Ave Maria)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모송은 주님의 기도와 함께 자주 염하는 기도로서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찬미와 존경을 드리며 우리를 위해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비는 기도이다. 성모송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리아를 찾아온 대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 즉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루가 1,28)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알고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루가 1,42)라고 인사한 말로 구성되어 있다. 후반부는 성모 마리아의 전달을 구하기 위하여 교회가 만든 기도문이다.
주님의 천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 호칭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신 분, 하느님과 일치되어 계신 분,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는 이렇게 ‘은총이 가득하시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 분'이시기에, 대천사의 지위에 있는 가브리엘이 ‘기뻐하소서' 하며 축하의 인사를 하였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시도록 간택되셨으니 이런 인사와 축하를 받으심이 마땅하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었기에,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에게 대천사 가브리엘보다 더 분명한 말로 인사하며 ‘여인 중에 복되시다'라고 칭송하였다. 엘리사벳의 이 인사말에는 자기의 남편 즈가리야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으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셨으니 세상의 어떤 어머니보다 행복하시다는 축하의 뜻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잉태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구세주가 인류에게 베풀고자 하는 모든 은공을 이미 받은 결과이다. 즉 죄악의 손상을 받지 않은 채 항상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으로 구원된 자의 으뜸이 되었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하며 엘리사벳의 인사는 계속된다. 태중에 계신 예수는 영원히 복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어머니의 복은 아들의 복이고 아들의 복은 어머니의 복인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누리시는 복을 인간인 성모 마리아도 함께 누리시게 되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만이 복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성모 마리아의 아들로서 어머니의 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낳으신 예수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느님[天主]의 어머니'라고 즐겨 부른다. 하늘에 올림을 받아 천상 모후의 영광을 누리시는 성모 마리아는 주님과 항상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가장 좋은 은총의 전구자가 되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영생과 영벌이 결정되는 순간, 즉 죽음에 임할 때 믿음과 겸손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 빌어주시기를 간구한다. 많은 성인 성녀들, 특히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은총 자체이신 구세주를 인류에게 주신 하느님께서 오늘날에도 성모 마리아의 청으로 많은 은총을 주신다고 확신하였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의 어머니로서 또한 은총의 중재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계심을 우리 삶을 통하여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우리 어머니신 성모 마리아의 모정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신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특별히 죄중에 있을 때 죄인들의 구원자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께 간구한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를 닮아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할 수 있는 굳은 믿음과 깊은 겸손으로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되게 살며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웃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신경(使徒信經 Apostles' Creed)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신경'이란 말은 라틴어로 Symbolum(표시)이라 하는데 신앙적 교리를 교회가 권위있게 공식 문구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신경을 염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모두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신자의 표시로 신경을 염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도와 함께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의 특권으로서 이 기도를 염하게 했고 이 기도의 내용을 믿는 것은 신자의 의무였다. 모든 신경은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믿음이란 지성을 가진 피조물, 즉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믿음은 오관(五官)을 통해서 감지할 수 없고 지능으로 밝혀 깨달을 수 없지만 말씀하시는 이의 진실성을 보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경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 그 업적을 차례로 고백한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배운 신앙의 근본 가르침이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성전(聖傳)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모든 교리가 요약되어 있으며 열두 개의 신앙 조항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나는 무(無)에서 유(有)를 지어내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다. 2. 나는 생명의 근원이신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그분이 바로 나의 주님이심을 믿는다. 3. 나는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모독 하고 백성을 현혹했다는 유다인들의 고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의 돌무덤에 묻히셨음을 믿는다. 4.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승[古聖所: 구약의 성인들이 구세주 오시기를 수천 년 동안 고대하던 곳]에 가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 되셨음을 믿고, 하느님의 친아들이심을 믿는다. 5.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40일만에 하느님 나라에 오르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어 아버지와 똑같은 영광을 누리시며, 이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시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 6.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종말에 권능을 가지고 다시 오시어 산 이와 죽은 이, 즉 모든 사람을 심판하여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7. 나는 천주 제3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같이 한 하느님이시고, 진리와 생명과 사랑, 즉 모든 은총의 근원이신 성령 을 믿는다. 8.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구원이 될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와 세상 종말에 완성될 순례하는 교회를 믿는다. 9. 나는 하늘 나라에 있는 성인들과 세상을 떠나 정화 중에 있는 연옥 영혼들, 그리고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가족을 이루어 같은 생명을 누리면서 서로 공(功)을 통함으로써 도와 주고 있음을 믿는다. 10.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첫째 이유가 우리에게 죄의 사함을 베풀기 위함이요,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하는 권한을 받은 교회가 우리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음을 믿는다. 11. 나는 죽은 후 육신은 땅에 묻히지만 세상이 끝나는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부활하여 심판을 받게 됨을 믿는다. 12. 나는 육신과 영혼이 다시 결합하게 되면 선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끝없이 누리리라는 것을 믿는다.
사도신경 외에도 다음과 같은 신경이 있다.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 AD 381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표현한 신경)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아타나시오 신경(Symbolum Athanasianum: 4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성 아타나시오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표현한 신경)
누구든지 구원 받으려면 먼저 공번된 신앙을 가져야 하나니, 이 신앙을 굳이 온전하게 보존하지 아니하는 자는 의심없이 영영 멸망하리라. 공번된 신앙은 세 위(位)에 한 천주시요, 한 천주 세 위심을 믿어 흠숭함이니, 위(位)를 뒤섞지도 말 것이요, 체(體)를 나누지도 말 것이로다. 성부의 위 다르시고 성자의 위 다르시며 성령의 위 다르시도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이 하나이요, 영광이 같으시고 위엄도 같이 영원하시도다. 성부 그러하시면 성자도 그러하시고 성령도 그러하시도다. 성부도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자도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령도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성부도 무한하시고 성자도 무한하시고 성령도 무한하시며, 성부도 영원하시고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도 영원하시도다. 그러나 영원한 분 셋이 아니요 다만 영원한 분 하나이시며, 또 창조되지 않으신 분 셋이 아니며 무한하신 분도 셋이 아니요, 오직 창조되지 않으신 분도 하나이시며 무한하신 분도 하나이시로다. 또한 성부도 전능하시고 성자도 전능하시며 성령도 전능하시나 전능하신 분 셋이 아니요 전능하신 분 다만 하나이시며, 성부도 천주시요 성자도 천주시요 성령도 천주시로되 천주 셋이 아니라 다만 천주 하나이시며, 또한 성부도 주님이요 성자도 주님이요 성령도 주님이로되 주 셋이 아니라 오직 주 하나이시로다. 위마다 각각 천주시며 주님이심을 고백해야 하나 천주 셋이라거나 주 셋이라고 함은 공번된 신앙에 어긋남이로다. 성부는 결코 지음을 받지도 않으시고 창조되지도 않으시고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께 지음을 받지도 않으시고 창조되지도 않으시고 다만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지음을 받지도 않으시고 창조되지도 않으시고 태어나지도 않으시고 다만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도다. 성부 셋이 아니요 성부 하나이시며, 성자 셋이 아니요 성자 하나이시며, 성령께서 셋이 아니요 성령께서 하나이시로다. 또한 이 세 위에 선후도 없고 대소도 없고 오직 세 위 함께 영원하시고 서로 같으시도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세 위에 한 체이시고 한 체에 세 위심을 반드시 믿어 흠숭할 것이며, 구원받으려는 자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와 같이 믿을 것이로다.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심을 충실히 믿어야 할 것이로다. 바른 신앙은 천주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주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함이로다. 천주이심은 성부의 본체에서 영원으로부터 나심에서요, 사람이심은 모친의 본체에서 세상에 태어나심에서이다. 그는 참천주시요, 영혼과 육신을 갖추신 참사람이시로다. 천주성으로는 성부와 같으시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시도다. 천주시며 사람이시나 둘이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 한 분이시로다. 한 분이심은 천주성이 변하여 육신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인성을 취하여 천주성에 결합하심으로써이며, 참으로 한 분이심은 본체의 혼합으로써가 아니라 위가 하나이심으로써이다. 영혼과 육신이 사람을 이룸같이 천주성과 인성이 그리스도를 이룸이로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육신과 함께 부활하여 자기 행위에 대하여 셈바치리라. 선을 행한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고 악을 행한 자는 영원한 불로 가리라. 이것이 공번된 신앙 교리로다. 아무라도 이것을 충실히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리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 밖에도 다른 신경이 많이 있다.
고백기도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하루하루를 살 수 있으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나, 하루를 살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많이 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끼친 누(累)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한다. 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게 하고, 세상살이도 무질서하게 만들어 불행을 초래하며 이웃에게 해를 끼친다. 혼자만의 숨은 행위라 할지라도 이웃과 관련이 없는 죄는 없다. 따라서 무슨 죄이든 죄는 하느님의 영광에 손상을 끼치고 하느님의 분노를 사고 하느님의 은총을 감소 혹은 단절하여 하느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한다. 더 나아가 내 안에는 하느님 대신 악이 자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도록 빨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뉘우침과 고백이 필요하다. 이 뉘우침과 고백을 도와 주는 기도문이 ‘고백기도'와 ‘통회기도'이다.
이 기도에 담긴 뜻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시어 저의 마음속까지 알고 계신 하느님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며 나의 성장을 도와 주고 있는 형제들에게 저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애덕을 거스렸고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였기에 이를 고백합니다. 저는 제가 범죄하게 된 원인을 어느 누구의 탓으로 돌려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죄한 제 자신을 미워하고 스스로 저의 가슴을 치면서 뉘우칩니다. 하지만 저는 죄인으로서 감히 하느님 대전에 용서조차 빌 면목이 없으니,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은총의 전달자들은 저를 대신하여 저를 위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간구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분노를 거두시고 죄를 사하시어 은총 중에 살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십시오.”
미사 중에는 고백기도를 당연히 하고 있지만, 죄를 범한 후에나 하루를 반성한 후, 혹은 고해성사 전에 이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로운 용서를 청해야 하겠다. 아울러 통회기도도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어떤 경우에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뉘우침이 요구된다. 진정한 뉘우침에는 진실한 고백과 새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결심이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뉘우침에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한 8,11)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한다.
통회기도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아멘.
이 기도에 담긴 뜻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당신의 피조물인 저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주님의 성령과 외아드님을 보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외아드님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희생시키는 크나큰 사랑을 베푸셨고, 온갖 성사와 은총으로 저를 주님께로 이끄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외면하고 게으름과 사욕과 세상의 유혹에 빠져 당신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의 잘못으로 당신께 누를 끼쳤음을 깨달아 진심으로 뉘우치니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제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을 알고 제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깊이 깨달아 저에게는 죄 사함의 길이 되고 주님께는 저로 인해 손상된 당신의 영광과 위엄을 되찾도록 보상하기 원하오며, 진선미의 근원이신 주님만을 사랑할 것과 또다시 주님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것을 굳게 결심합니다. 이 결심을 깨뜨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 주님과 함께 영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으로 도와주십시오.” 통회기도는 언제라도 할 수 있으나 특히 죄를 범한 후, 하루를 반성하고, 고해성사 전에 함으로써 완전한 통회를 발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야 한다.
삼덕송(三德頌)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느님 편에서는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자비(은총)이고,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이다. 그래서 이 신덕, 망덕, 애덕을 ‘향주삼덕(向主三德) 혹은 대신덕(對神德)'이라 하고, 줄여서 ‘삼덕'이라 한다. 덕은 어떤 선을 되풀이함으로써 생기는 좋은 습성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이에 거스르는 행위를 했을 경우 두렵고 괴롭지만 덕을 실천하면 기쁘고 편안함을 느낀다. 반대로 덕이 없는 사람이 덕을 실천하려면 어렵고 힘이 들지만 덕에 어긋나는 행위는 쉽게 행한다. 덕을 쌓으려면 처음에는 어렵고 힘이 들지만 계속 노력하면 기쁨을 느끼게 되고 실천하기가 쉬워진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을 닮게 창조하시고, 당신의 가족으로 초대하셨다. 우리는 덕을 쌓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어야 한다. 향주삼덕은 세례성사를 받을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다. 그러나 평생토록 이 덕행을 닦으며 더 큰 덕을 주시도록 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삼덕송을 바쳐 믿음, 희망, 사랑의 초자연적 덕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하겠다.
신덕송(信德頌)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신덕이란 인간의 지혜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는 덕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거저 주심으로써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진리의 근원이시고 그르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느님은 속이지도 속을 수도 없는 분, 즉 진실하신 분이시기에, 그 진실성 때문에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는 것이다. 진실성이라 함은 사랑과 품위와 기적으로써 진실함을 드러내어 믿게 하심을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으시므로 갖가지 방법으로 계시된 진리를 교회에 맡기시고 교회로 하여금 이를 가르치게 하셨다. 그리하여 교회는 성서와 성전의 관리자가 되었고,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그르침이 없이 가르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것처럼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망덕송(望德頌)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망덕은 우리의 소원인 영원한 생명,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모시는 삶을 갈망하고, 이를 진정으로 원하고 청하며 신뢰로써 계속 바라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이 태양을 향해 살 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향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진실됨을 믿기에 한낱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둔다. 즉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진실되고 능하실 뿐만 아니라 성실과 자비의 근원이시므로 주님께 진정으로 바라고 믿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어김없이 지키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과 그 은총의 결과로 인간에게 허락된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은총을 베푸시지만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은총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자주 하느님께 구원의 은총을 청해야 하며, 굳은 믿음과 신뢰심을 가지고 영생을 향해 살아야 한다.
애덕송(愛德頌)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애덕은 신덕과 망덕의 결과이며 모든 덕의 중심이고 완성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시고 모든 희망을 채워주시는 좋은 분이라 믿고 바랄 때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진선미 자체이시고 만물의 근원이요 목적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상 최대로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몸같이'라는 말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베푼다는 뜻이다. “믿음, 희망,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참고).
봉헌(奉獻)기도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 아멘.
세상에는 많은 피조물들이 있지만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느님께 의식적으로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닌 존재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내셨으니' 나도 하느님께 사랑을 드림은 마땅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기쁨과 진선미를 함께 나누시기 위해 나를 내시고, 나에게 아름답고 신비스런 육신, 그리고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나를 지어내셨으니(창세 1,26-27 참고), 나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나의 품위를 지키고 하느님을 더욱 닮아 세상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또한 나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창조된 이웃이 완성을 향해 성장하도록 사랑으로써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하겠다.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데 사용하고자 고스란히 주님께 바친다. 자신의 뜻과 편의와 이익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산다는 것은 희생이며 고통이지만 이와 같은 삶은 분명히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봉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찬미의 제물'이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봉사의 제물'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행위는 물론 온 존재가 찬미와 봉사의 제물이 되도록 아낌없이 바쳐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들이'시도록 해야 하겠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말한 마리아의 대답은 가장 완전한 봉헌의 자세요 기도이다. 이 완전한 봉헌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 안에 잉태되어 사람이 되게 하였다.
우리는 곧잘 내 생명, 내 재능, 내 소유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모 마리아와 같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살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언제 어떤 환경에서 나를 어떻게 쓰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봉헌기도는 그 내용이 매우 함축적이어서 ‘가톨릭 주요 기도문' 전체 내용의 요약이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주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봉헌기도에서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기를 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는 전능하신 분이며 또 모든 것을 차지하실 분으로 인정하고 모든 것을 드린다. 받는 사랑에서 보답하는 사랑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드린다고 해서 하느님께 보탬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봉헌을 어여삐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지음받은 존재로서 이 봉헌기도를 바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새로운 일을 계획하기 전에, 고해성사로 다시 태어난 후에, 하느님을 더 가까이 느낄 때, 혹은 새로운 사명을 받았을 때 이 봉헌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다. 자신을 하느님의 것이 되도록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큰 영광이요 기쁨이다. 드림으로써 참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봉헌기도문이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예수 성심 봉헌문:가정, 단체, 사업체, 성당 등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강복하시고 함께 하시기를 비는 기도문이다[가톨릭 기도서 82면 참고].
성모 성심 봉헌문: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우리의 생명과 소유물을 봉헌하고 하느님의 계명과 교회의 법규를 충실히 지킬 것을 서약하는 기도문이다[가톨릭 기도서 83-85면 참고]. |
| [제 1편 기도생활] 제5장 - 위령기도 |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식사 후 기도 중에, 미사 중에, 그리고 위령의 달을 따로 정해서 기도하고 있지만 우리의 기도를 갈망하고 있는 죽은 이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좀더 자주 위령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면 우리를 사랑하던 그들의 고통을 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자주 위령기도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하느님의 품에 평안히 쉴 수 있게 해 드려야 하겠다 [위령례와 장례 때의 기도는 부록Ⅰ 참고].
위령기도 + 지극히 어지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 믿으며 (○○)를 아버지 손에 맡겨드리나이다. ○ (○○)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 무수한 은혜를 베푸시어 아버지의 사랑과 모든 성인의 통공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감사하나이다.
• 하느님 아버지, 저희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고 남아있는 저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믿음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시편 130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어주소서. 제가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 하시나이다. 제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제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주님께는 자비가 있사옵고 풍요로운 구속이 있음이오니 당신께서는 그 모든 죄악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이다.
+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시편 51 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저의 죄를 없이하소서. 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제 허물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저는 저의 죄를 알고 있사오며 저의 죄 항상 제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판결하심 공정하고 심판에 휘지 않으심이 드러나리이다. 보소서, 저는 죄 중에 생겨났고 제 어미가 죄 중에 저를 배었나이다. 당신께서는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제게 가르치시나이다. 히솝의 채로써 제게 뿌려주소서. 저는 곧 깨끗하여지리이다. 저를 씻어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이다. 기쁨과 즐거움을 돌려주시어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저의 죄에서 당신 얼굴 돌이키시고 저의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당신의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얼을 거두지 마옵소서. 당신 구원, 그 기쁨을 제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주소서.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오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하느님, 저를 구하시는 하느님 피 흘린 죄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제 혀가 당신 정의를 높이 일컬으오리다.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의 찬미 전하오리니 제사는 당신께서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리어도 받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느님, 저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께서는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주님, 인자로이 시온을 돌보시고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쌓아주소서. 법다운 제사와 제물과 번제를 그때에 받으시리니 그때에는 사람들이 송아지들을 당신 제단 위에 바치리이다.
+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또한 저희의 부르짖음이 주님께 이르게 하소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사망일로부터 장례일까지 + 기도합시다. 언제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오늘) 이 세상을 떠난 (○○)를 기억하시어 사탄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거룩한 천사들에게 고향 낙원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는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사오니 지옥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장례 후 탈상일까지 + 기도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를 생각하며 비오니 주님의 성인들과 뽑힌 이들 반열에 들어 주님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기일에는 + 기도합시다. 너그러우신 주 하느님, ○○의 기일에 천국 영광을 바라보며 비오니 세상에 사는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 주님, (○○)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 (○○)와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
| [제 2편 전례생활] 제1장 - 전례란 무엇인가? |
“전례(典禮)는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왜냐하면 사도적 활동의 목표는 모든 이가 신앙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한데 모이고,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고, 또한 주님의 만찬[성체]을 먹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전례 10). 그러므로 전례가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지만 전례를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여 전례를 생활화할 때 우리 구원은 확고해진다. 전례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속 수행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이다. 즉 교회가 성서나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공인한 의식(儀式)으로 개인의 신심생활과는 구별된다.
전례의목적 교회가 외적 의식을 통하여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회가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神的)이요, 볼 수 있는 면과 볼 수 없는 면, 활동을 하면서도 관상에 전심하고, 현세에 있으면서도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을 지향하고 신적인 것에 종속하고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을, 활동은 관상을, 현세의 것은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례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거처가 되게 하고, 신자들을 굳세게 하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게 한다. 그리고 외교인들에게는 교회를 ‘이교 백성들을 위한 깃발'로 드러내 보이며, 이 깃발 아래 모여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되게 한다(전례 2 참고).
전례의 세분야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이어나간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인 미사와 우리를 초자연적 생명에 참여케 하는 성사와 교회가 매일 드리는 성무일도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 특히 전례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성제, 특히 성체 안에, 더 나아가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신다.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바로 그분께서 지금도 사제의 봉사를 통하여 제사를 바치고 계신다. 교회가 성사들을 집행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성사 안에 현존하신다. 예컨대, 성사를 베푸는 사람이 누구이든 예수 그리스도 친히 성사를 베푸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도 현존하신다.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교회가 기도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기 현존하신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
전례는 우리의 신앙을 감각할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 신비체[교회]의 공식 흠숭이다. 그러므로 모든 전례의식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도 다른 어떤 행위보다 뛰어난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인 전례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서'와 ‘성사 예식서'를 따라야 한다. 이 책들은 교회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전례의 일치성 전 세계에서 같은 날, 같은 형식, 같은 지향으로 하느님을 찬미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요 가치있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렇게 일치된 전례행위에서 전 세계 교회와의 일치를 외교인들에게 드러내고 우리 스스로 전 세계 교회와 하나되어 살고 있음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이 일치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도록 베푸신다. 그러므로 신자 각자는 전례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례를 함께 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전례는 존엄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예(禮)이지만 신자들을 교훈하기도 한다.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백성들은 노래나 기도로써 이에 응답하고 있다(전례 33 참고).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 말씀, 음악,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고 뜨겁게 만들어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이 된다.
전례기도와 개인기도 전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전례기도와 개인기도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전례기도는 교회 전체의 기도이고 그리스도 공동체의 기도로서 모든 신자들이 내적으로 갈망하는 것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개인기도나 단체기도는 이러한 전례기도에로 지향된 기도이며, 개인이나 단체가 자기들의 청원을 하느님께 아뢰는 것이다. 개인기도는 전례기도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미사, 성사, 성무일도 등은 전례이고,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기도회 등은 여러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지만 전례가 아니라 신심행위이다. 전례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교황청이 인준한 기도문을 사용하고
둘째,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며
셋째, 정식으로 임명된 사람(사제 혹은 수도회 장상)이 전례를 지도해야 한다. |
| [제 2편 전례생활] 제2장 - 전례주년 |
교회는 일 년을 한 주기로 구세사를 새롭게 기념하며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교회 구성원 각자가 구원의 은총을 입어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전례주년은 구세사의 순서에 따라 펼쳐진다
제1절 전례주년의 구성 교회는 일 년을 한 주기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한다. 전례에서의 기념이란 현재화(現在化)한다는 뜻이다.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오늘의 현실로 거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각 부분을 전례로써 재현하고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 만남 안에서 무한한 은총을 얻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전례주년의 중심 그리스도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되고 그의 부활로써 완성되기 때문에 전례주년도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교회 전례주년은 주님의 성탄과 부활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탄은 부활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부활이 교회 전례의 중심이요, 정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탄과 부활, 이 두 축제시기 전에 각각 준비기간이 있다. 즉 4주간의 대림시기와 40일간의 사순시기이다. 이 준비기간에는 제단과 제의가 자색이며 속죄와 회개를 촉구한다. 성탄과 부활은 각각 다른 축제들을 동반하는 동시에 그 축제들의 중심이 된다. 성탄시기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성가정 축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주님 세례 축일, 주님 봉헌 축일을 수반한다. 예수성탄이 있기 위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축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등이 있게 된다. 부활시기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파스카의 3일과 계속되는 부활주일들, 주님 승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수반하고, 부활의 신비를 계속 이어가는 축제 즉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 성심 대축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등이 따른다.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기쁨, 찬미, 겸손, 극기, 자선, 기도와 재(齋)를 강조한다. 성탄과 부활축제는 순결과 기쁨을 드러내는 백색 제의로 장식된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의 재결합의 기쁨을 표현한다.
성탄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우리에게 이루어 줄 온갖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고, 부활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뒤따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기쁨을 세상에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동경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성탄 전 대림 제3주일과 부활 전 사순 제4주일에는 장미색 제의를 입는다. 이는 대축제를 준비하기 위하여 고신극기와 기도로 지쳐 있는 신자들에게 희망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 줌으로써 더 큰 기대와 위로를 주고자 함이다.
계속되는 부활 경축일[연중주일] 안식일[일요일]이 시작될 때 무덤에서 영광스럽게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암흑을 없애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셨으며 우리를 위한 빛이요, 생명이요, 기쁨이 되셨기에 일요일을 주님의 날[主日]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한다. 주일을 거룩하게 경축하는 것은 전례생활의 기초가 된다.
성인 축일과 전례주년 성인 성녀들의 축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자로서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을 당하였고 그리스도의 영광된 부활에 참여한 분들이다.
성인 성녀들은 세례로써 시작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성하였고 승리의 월계관을 쓰신 분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인들의 천상 탄일을 축일로 경축하고, 이 축일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선포하며 그들을 승리로 이끄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린다. 그리스도의 신비와 연관되어 성모 마리아의 축일들이 전례주년 안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교회는 성탄을 경축하면서 예수님을 낳아 준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념하고 있다. 성탄 8부, 즉 1월 1일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낸다.
성탄 후 40일이 되는 2월 2일에는 주님의 축일인 동시에 성모 마리아의 축일인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낸다. 교회는 이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초를 축성하여 봉헌한다. 아울러 성탄 전 9개월이 되는 3월 25일에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냄으로써 성모 마리아께서 태중에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경축한다. 9월 8일에는 마리아께서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사이에 구세주의 어머니로 탄생하심을 경축하는 성모 성탄 축일을 지내고, 이날부터 9개월 전인 12월 8일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을 지냄으로써 인류 구원이 가까이 옴을 기뻐한다. 8월 15일은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탄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을 경축하면서 우리도 하늘에 불림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 우리의 생활 〉 우리 모두가 교회의 지향대로 각 전례시기의 고유한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구세주를 기념하고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면서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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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편 전례생활] 제3장 - 성월과 성년 |
신심이나 덕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특별히 어떤 달[月]을 정하여 집중적으로 어떤 신심이나 덕을 쌓기로 노력하며 기원하는 달을 성월(聖月)이라 한다. 한국교회는 해마다 다음과 같이 여섯 번에 걸쳐 성월을 지낸다.
제1절 성 요셉 성월(3월) 성 요셉의 탁월함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께 가리워 그 빛을 잃고 있으나 성 요셉은 예수님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다. 아울러 자기 임무에 충실함과 탁월한 겸손과 신뢰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겸손한 하느님의 종 성 요셉은 다윗의 후손(마태 1,6-16 참고)이었으며 하느님의 종으로서 충실하였다. 힘든 목수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마리아께서 잉태한 사실을 알고도 즉시 파혼하지 않고 신중히 하느님의 뜻을 찾다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의 전능에 의해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전해 듣고 하느님의 일로 받아들였다. 이는 마리아께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며, 크나큰 신앙과 겸손과 신뢰가 필요했다.
정결한 남편 요셉은 동정을 원하는 마리아를 아내로 택하여 정혼하였다. 그는 성 마리아께서 평생 동정을 지킬 수 있게 보호하였고, 스스로 동정의 위대함을 알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 완전한 봉헌은 구원사업의 기초가 되었다.
성실한 아버지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의 보호자로서, 예수님의 양부로서 그 임무를 다하기에 매우 힘들었으나 조금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해산할 때가 임박한 성모 마리아와 함께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했고, 베들레헴에서는 아기가 태어날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동굴을 찾아 예수님을 낳게 하고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였다. 폭군 헤로데가 예수 아기의 탄생을 알고서 군사를 풀어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으므로 외국 땅 에집트까지 피난을 가야 했으며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국 땅에서 온갖 역경을 겪으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헤로데가 죽은 뒤 주님의 천사가 에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고 일러주었다. 요셉은 일어나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마태 2,19-21).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천사의 말에 귀기울이며 행동하였다. 이것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과 하느님께 대한 순종의 정신이 철저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나자렛에서 얼마나 더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명절을 지내러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었다(루가 2,52 참고). 성 요셉은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계획하신 구원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택하신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을 보호하고 부양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성 요셉은 성실하나 극히 평범한 한 가장에 불과했다. 교회는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자이신 성 요셉을 모든 노동단체의 모범으로 삼고 노동자의 보호자로도 받들고 있다[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은 3월 19일이지만, 5월 1일에 노동자 성 요셉을 기념한다]. 성 요셉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복되게 운명하였기에 교회는 임종자의 주보로 받든다.
〈 우리의 생활 〉 성 요셉의 충실한 삶을 통해 우리는 인류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성 요셉의 표양을 본받아 자신에게 말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인류구원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
| [ 제 3편 성사생활] 제1장 - 세례성사 |
세례성사 처음 받는 성사를 세례성사(洗禮聖事)라고도 하고, 세례성사를 받는 예식을 세례(혹은 세례식)라한다. 세례를 받는 것을 영세(領洗)라 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을 영세자(領洗者)라고 한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히고, 함께 부활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백성[교회]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제1절 생명과 정화 물은 사람의 생명과 정화(淨化)에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물을 중요시하셔서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세 1,2). 노아의 홍수 때 물로써 세상을 정화하시고(창세 6-9장),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물[홍해]을 건넘으로써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다(출애 14장). 또한 40년이란 긴 광야의 시련을 겪고 요르단 강 물을 건너 약속의 땅을 얻었다(여호 4장).
예언자 에제키엘은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내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 너희는 ?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6,24-28)라는 하느님의 새로운 계약, 즉 이스라엘은 물로 깨끗이 정화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했다. 세례자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베풀어질 세례성사를 준비하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태 3,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아버지의 증언을 들으셨다.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시고,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루가 12,50)고 하셨다.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당해야 할 고통과 희생으로써 우리는 더욱 완전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삶을 사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습니다”(갈라 3,27-28).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로마 6,3-4). 사도 베드로는 영세[세례를 받음]한 사람의 지위와 사명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1베드 2,9-10).
그리스도인(人) 우리는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되어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1)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로써 죄, 즉 원죄(原罪), 본죄(本罪), 죄벌(罪罰)을 용서받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인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져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4).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신비체(神秘體)'를 이룬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고린 12,20).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성되도록(갈라 4,19)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마침내 함께 다스리기 위해서 그 생활의 신비 속에 잠기는 것이다”(교회 7). 3)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 개별체로서 당신 생명 에 참여하도록 부르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한 백성으로 세우시어 그 백성 안에 흩어져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로 모여질 수 있기를 원하셨다”(선교 2).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 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2베드 1,4). 4)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거룩한 집이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 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여러분도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에페 2,19-22). 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이고 하느님 은총의 부를 누릴 자격을 갖는다. 영세한 사람은 다른 성사를 받을 자격을 갖게 된다. 모든 성사는 세례의 은총을 보충, 유지, 발전시켜 준다. 6)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고,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함께 수행한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여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한 몸을 이루는 평신도들은 누구든지 산 지체 로서 교회의 발전과 그 끊임없는 성화를 위하여 창조주의 선물이며 구세주의 은총으로 받은 스스로의 힘을 다해야 하도록 불렸다. 평신도 사도직은 교회의 구원 사명 자체의 한 부분이며, 주님께서 친히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이 사도직에 부르시는 것이다”(교회 33). |
| [ 제 3편 성사생활] 제2장 - 견진성사 |
견진성사는 주교의 안수와 크리스마 성유의 도유(塗油)로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는 성사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성사를 완성하는 성사로서 성령과 그 특은을 주어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이 견진성사를 소홀히 여긴다든가 두렵게 생각하여 미루는 것은 주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1절 그리스도와 성령 신약성서에는 구원사명을 완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께서 어떻게 도와 주셨는지 잘 설명되어 있다.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다음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을 보셨고(마르 1,10), 그 성령께서는 예수님 위에 머물러 계셨다(요한 1,32). 예수께서는 성령의 현존과 도움을 받아 메시아의 직무를 공적으로 시작하시도록 성령의 재촉을 받으셨다(마태 4,1). 또 나자렛의 백성들을 가르치시면서 ‘주님의 성령께서 내 위에 내리신다'하는 이사야의 예언을 당신께 관한 것이라고 암시하였다(루가 4,17-21 참고).
그리스도의 약속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시면 박해자들 앞에서까지 용감히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루가 12,12). 수난 전날에는 사도들에게 진리의 성령을 성부께로부터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고(요한 15,26), 그분이 오시면 영원히 함께 계셔주실 것이며(요한 14,16) 당신을 증거하도록 도와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5,26). 부활하신 다음에는 성령강림을 예고하시며 “너희는 위에서 오는 성령의 능력을 받을 것이며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사도 1,8;루가 24,49).
사도들과 성령 성령 강림 축일에는 기묘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사도 2,4)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찬양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 위에 내려오신 성령을 메시아 시대의 선물로 여겼다(사도 2,17-18).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세례의 은총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안수로 새 신자들에게 성령의 특은을 베풀어 주었다(사도 19,5-6). 이리하여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교 첫 입문교리 가운데 세례의 교리와 함께 안수의 교리도 언급하게 되었다(히브 6,2-4). 견진성사는 처음부터 안수와 도유(塗油)로 이루어졌고 성령 강림의 은총을 교회 안에 영속시키고 있다.
이로써 견진성사의 고유성과 중요성이 드러난다. 신자들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세례와 견진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이다”(선교 36). 세례성사로써 죄의 사함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과 성령의 인호를 받게 되며 교회의 지체가 되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게 된다(1베드 2,9). 또 견진성사로써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인 성령을 받게 됨으로써 ‘특별한 능력을 받고' 견진성사의 인호를 받아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며 옹호할 힘을 갖게 된다(교회 11;선교 11 참고).
또한 견진은 성체와 밀접히 연결되는데, 세례와 견진으로 인호를 받은 신자들이 영성체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온전히 결합된다. |
| [ 제 3편 성사생활] 제3장 - 성체성사 |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내어주는 성사이므로, 모든 성사의 중심이고 정점이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가장 큰 성사이다. “우리 구세주께서 팔리시던 날 밤 최후의 만찬 중에, 당신의 살과 피로써 감사의 제사를 제정하셨으니 ? 이 제사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요, 사랑의 맺음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게 하여 마음을 은총으로 충만하게 하고, 우리에게 장래 영광의 보증을 주는 파스카[즉 죽음에서 영광된 새 생명으로 건너감] 잔치이다”(전례 47). 세례와 견진과 성품은 일생에 단 한 번 받아 그 효과가 일생 동안 지속되는 반면 성체성사는 신자의 지상 행로에 있어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첫영성체로써 신앙의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신자생활을 시작하려는 어린이들이나 개종자들과 입교자들의 첫영성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장엄하게 거행한다. 즉 우리는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견진으로써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증거하기 위해 축성되며, 성체로써 보다 더 긴밀하게 보다 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된다. 둘째는 우리가 여러 번 반복하여 성체를 먹기 때문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성체는 지상 행로에서 여행할 힘과 기쁨을 주기 때문에 ‘나그네의 음식'이라고도 한다.
제1절 성체성사의 약속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 사막에 내린 만나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참된 선물, 즉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빵인 성체성사의 예표이다(출애 16-17장 참고). 예수께서는 이 예표를 완성하시고 실현하신다. 그분은 생명의 빵이시다. 그분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인 동시에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 내어주신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빵의 기적을 행하시어 배불리 먹게 하신(요한 6,1-15 참고) 다음, 구약의 만나와 당신 자신을 비교하시면서(요한 6,43-50 참고) 하늘의 빵을 약속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한 6,32). 그리고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성체성사의 설정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하느님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 먹게 될 완성된 과월절 음식(루가 22,15-16 참고)을 준비하시고,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는 예수께서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물을 들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에 축성 의식을 행하심으로써 이 음식을 성체와 성혈이 되게 하셨다.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
예수님에 의해 구원사업이 완성된 것은 그분이 스스로 생명을 바치신 결과이다. 즉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를 속죄와 영생으로 인도한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은 지상의 정치적, 경제적 속박에서가 아니라 죄의 예속에서 인류를 해방시켜 준다.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인류를 다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심으로써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고한 ‘새로운 계약'(예레 31,31-34 참고)을 완성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의 몸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것이고, 그분의 피는 ‘너희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 인류를 위한 속량의 대가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진 제물이시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을 명백하게 예고하시고, 또 이 죽음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희생제물의 피를 흘려 바친 제사(출애 24,5-8 참고)와 같은 것이라고 암시하셨다. 따라서 그분의 죽음은 그 당시 제사로 바치던 과월절 속죄 양으로 예시되었다(1고린 5,7 참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시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사랑으로 바쳐진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우리는 주님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주님과 한 몸이 되고, 주님을 통해 다른 지체들과 한 몸이 되는 이 사랑의 제사에 참여하게 된다(1고린 10,14-22 참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제사는 성찬으로 표현되고 이 성찬은 사랑의 성사이고,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되는 일치의 성사이다.
성체성사와 계속되는 미사
성체성사를 세우신 때의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로써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현재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바치셨고(히브 12,24 참고),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으로 살아가고, 이를 재현하는 미사성제를 계속 봉헌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이루어졌으나 그분은 이 미사성제를 통하여 현재의 일로서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당신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고 계신다. 따라서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이며 우리의 제사이다. |
| [ 제 3편 성사생활] 제4장 - 고해성사 |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로써 받은 하느님의 생명을 죄로 말미암아 잃었을 때, 인간의 회심과 하느님의 용서로써 이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성사이다.
제1절 그리스도와 용서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이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십자가의 피로써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평화롭게 이룩하시어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셨다(2고린5,18;골로1,20참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시고(요한8,34-36참고) 어두움 속에서 놀라운 광명에로 부르기 위해(1베드2,9참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셨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하며 참회를 요구하는 말씀으로 당신의 지상 사명을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오라(루가15장참고)고 권고할 뿐 아니라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루가5,20;7,48참고). 또한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죄를 사하시는 당신의 권한을 보여 주셨고(마태9,2-8참고), 마침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로마4,25참고).
이런 이유로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 수난에 앞서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피로써 새 계약의 제사를 세우시고(마태26,28참고),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이 지상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시고(요한20,19-23참고), 당신의 이름으로 만백성에게 죄 사함의 기쁜 소식을 전할 직무를 맡기셨다(루가24,47참고).
죄의 용서를 위하여 죄의 용서는 물로 씻는 세례성사로써 비로소 이루어진다. 죄 중에 있던 묵은 사람이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된다 (사도 3,19;17,30 참고). 이 때문에 교회는 ‘죄의 용서를 믿으며'(사도신경) 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주심으로써 세례성사를 받은 후 죄에 떨어지는 신자들이 하느님과 다시 화해하고 은총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고해성사를 당신 교회 안에 제정하셨다. 교회는 “물과 눈물을 가지고 있으니,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그것이다”(성 암브로시오).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하여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가끔 유혹에 빠져 불행히도 죄에 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고 무죄하고 순결하시고(히브 7,26 참고) 죄를 모르시는 분(2고린 5,21 참고)이셨지만,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히브 2,17 참고). 이처럼 교회는 ‘거룩하나 죄인들을 품고 있기'에 항상 정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회의 정을 전례로써 나타낸다. 예컨대, 참회 예식, 미사 중의 참회부분 등에서 신자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용서를 청한다. 죄인인 우리는 특별히 고해성사로써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 하느님과 화해하고 동시에 교회와 다시 화해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참회의 길을 걷는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제헌하신 그리스도와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류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갖춘 사랑의 설계이다. |
| [ 제 3편 성사생활] 제5장 - 혼인성사 |
혼인성사는 가톨릭 신자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본당신부와 증인들 앞에서 자유로이 사랑의 원의를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성사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부부 자신이 성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께서는 혼인제도를 자연상태로 두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신자들의 혼인을 성사의 차원으로 높이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부부 자신이 성사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을 잊고 있다.
제1절 혼인의 성사성 신자 남녀의 결혼은 혼인성사이다. “혼인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은총을 부부에게 준다. 이 성사의 은총은 부부의 인간적 사랑을 완성하고, 해소할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굳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그들을 성화한다”(교리서 1661).
가톨릭 신자의 혼인은 성사이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밖으로 나타나야 한다. 한집에 기거하여 가정을 이룸으로써 부부 서로가 헌신, 열망, 존경, 관심 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이고 줌으로써 일치의 심도를 더해 가야 한다. “여기 있는 ○○를 당신의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까?” 하는 질문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함과 동시에 부부가 되고 하느님의 사랑의 축복을 받는다. 부부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을 주고 받을 때마다 혼인성사는 다시 새로워지고 성사의 은총을 받게 된다. 따라서 부부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로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큰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게 된다. 세상과 교회는 부부를 통해서 더 부요(富饒)해지며, 부부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녀들은 부부의 사랑에 의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혼인성사는 이렇게 항구적인 성사로서 혼인 당일뿐만 아니라 영구적인 계약으로 남아 있으며, 예수께서 당신 피로써 맺으신 새 계약(마태 26,28 참고)으로 교회의 신랑이 되신 그 관계를 상징한다. 부부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상징하는 만큼(에페 5,32 참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내어주시기 위하여(요한 10,10 참고) 구원이라는 사랑의 결실을 맺으셨다. 이와같이 서로에게 헌신하는 부부의 사랑도 새로운 생명[자녀]이라는 사랑의 결실과 그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은 서로의 사랑이 맺은 새로운 생명인 자녀들을 통하여 자기의 부모가 자기들에게 베푼 헌신적인 사랑에 보답하게 된다. 혼인성사는 부부 사이에만 은총을 주는 것이 아니고 부부가 자녀를 낳아 기르는 데 필요한 은총까지도 준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은 자기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자기와 관련있는 모든 사람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성사의 은총을 되도록 풍성히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혼인은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교리서 1533)이다. 부부는 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아껴 주고 격려하고 헌신하며 서로 성숙하는 데 협력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얻는다. |
| [ 제 3편 성사생활] 제6장 - 성품성사 |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성사들이다. 혼인성사와 성품성사는 타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개인적인 구원에도 도움이 된다. 성품성사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을 통해, 교회의 목자로 축성된다(교리서 1534-1535 참고). 성품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결속시키고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봉사함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전하고 다른 사람을 성화시키도록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에게 성직을 수여하고 그 성직을 타당하게 봉직할 수 있는 은총을 주는 성사이다. 성품성사로써 받는 사제직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신자 모두가 받는 일반 사제직과 구분된다. 이 성사로 축성된 사제는 성직 사제단의 일원으로 입적되고 지도자로서 임명되며 봉사자로서 맞갖은 삶을 살도록 성화된다.
제1절 사 제(司祭) 사제는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을 마음속에 품고 이를 실행하고 평화의 하느님과 함께 살며(필립 4,8-9 참고), 왕이신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하여 선임되어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한다. “따라서 사제는 기도와 예배를 행할 때에나, 말씀을 설교할 때에나, 성찬의 제사를 봉헌할 때에나, 다른 성사를 거행할 때에나, 사람들을 위한 그 밖의 직무를 수행할 때에나, 하느님의 영광을 더하고 사람들을 하느님의 생명 안에 진보시키는 데에 기여한다”(사제 2).
사 제(司祭) 1) 사제는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제사를 드린다. “대사제는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사제는 속죄를 위해서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히브 5,1).
2) 사제는 복음을 전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2).
3) 사제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명을 따라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늘 기도한다. 부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성무일도(聖務日禱)를 시간에 맞추어 바치고 있다. 성무일도는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끝기도, 독서의 기도로 되어 있다. 사도들은 부제들을 세우기 전에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다”(사도 6,4)고 밝혔다.
4) 사제는 목자(牧者)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착한 목자이신 것처럼 사제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를 도와 맡은 신자들을 사목한다. 사제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고 가장 낮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봉사한다(교리서 1551 참고).
5) 사제는 결혼생활을 포기한 사람이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살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교회에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가정을 포기한다. 독신생활은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최고의 희생과 사랑을 표현한다.
6) 사제직은 주교, 사제, 부제로 나눈다. 주교는 자기 교구 내의 본 목자로서 성직 전반(全般)에 걸쳐 권한을 가지며 온 세계의 주교들과 함께 온 교회를 이끌어간다. 교황은 으뜸 주교로서 주교들과 함께 전 세계 교회를 다스린다. 사제는 주교직에 속하여 있고 주교와 함께 교구 사제단의 일원으로서 위임받은 본당이나 혹은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주교의 보조자이다.
교구에 속하여 있는 사제를 교구(敎區)사제 혹은 재속(在俗)사제라 하고, 수도회에 속한 사제를 수도(修道)사제라 한다. 본당을 맡아 있는 사제를 본당(本堂)신부라 하고, 그 본당의 책임자이면 주임(主任)신부, 주임신부를 보필하는 신부를 보좌(補佐)신부라 한다.
부제(副祭)는 사제의 위임을 받아 말씀 전례와 세례성사 및 혼인성사를 집행할 수 있고 성체를 분배할 수 있다. 그 밖에 장례예식과 준성사를 집전할 수 있고, 기도 모임을 주관할 수 있다.
사제가 그 직무를 다할 수 있도록 신자들은 다음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사제(司祭)는 그 직책에 맞갖은 덕을 닦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제가 조용히 기도하고 공부하며 독서,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므로 그가 잡다한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협조해야 한다. 신자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예컨대, 본당 재정에 관계되는 일 등은 본당신부가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함이 좋다. 사제는 모든 이를 위한 사람이다. 필요 이상으로 자주 찾아가고 긴 시간을 빼앗아 마치 자기만을 위한 사제인 것처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회 전체와 사제 개인의 영적 진보를 직접 간접으로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제는 맡은 교회의 발전에 보람을 느끼며 산다. 사제는 모든 인간적 욕구를 오직 교회발전을 위하여 희생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일에 발전이 없고 노력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사제는 용기가 꺾이고 매사에 자신을 잃을 것이다. 한 지역의 지도자가 이렇게 된다면 교회와 신자 각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본당신부가 수행하는 사목 계획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모든 신자는 사제를 보호해야 한다. 세상이 윤리적, 정신적으로 혼탁해질수록 사제는 더 많이 요구되고, 사제가 독신생활을 하기에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사제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고 사제를 위해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사제의 약점을 감싸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사제에게도 인간적 실수나 약점이 있을 수 있다. 약점을 볼 때마다 비평이나 불평을 한다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결국 교회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것이니 사제를 옹호하고 돕도록 해야 한다. 사제에게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제이든 의식적으로 교회와 신자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제의 뜻을 따름이 교회를 위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부당한 요구라고 생각되거든 조용히 사제를 찾아가 자기 생각을 밝힘이 좋다. |
| [ 제 3편 성사생활] 제7장 - 병자성사 |
병자성사는 병자들의 도유(塗油)성사라고도 한다.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있는 신자에게 영적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는 성사이다. 교회는 “병든 사람을 고쳐주라”(마태 10,8)는 명령을 주님께로부터 받고 병자들을 보살피고 기도해 왔다. 사도시대에 병자들을 위한 특별한 예식이 있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제1절 병자성사의 대상과 효과 신자가 중병에 걸렸을 때 받는 성사가 병자성사이다. 병자성사를 받았다고 해서 삶의 희망을 포기할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낫기를 원하시고, 낫게 해 주시리라 굳게 믿는 병자를 볼 때마다 병을 낫게 해 주셨다.
어떤 사람이 받는가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이 임박한 이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육체가 쇠약해지거나 나이가 많아서 병이 들어 죽을 위험에 처하기 시작하면 이미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교리서 1514). 병자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 즉 첫고해성사를 받을 나이에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철들지 않은 어린이나 한 번도 지능을 쓰지 못한 사람은 병자성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으며,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다.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급격히 노쇠해지는 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교리서 1515 참고).
경한 병을 앓는 사람이나 죽을 위험이 없는 만성질환자는 병자성사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파선 중인 승선자, 사형수, 돌격하는 군인 등은 죽음의 위험이 임박하지만 병자성사를 받지 않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만 할 수 있다. 병자성사는 ‘산 이의 성사'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면 고해성사를 먼저 받아야 한다. 고해성사 받기를 거절하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다. 의식이 없다 해도 살아 있으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시기를 너무 늦추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는 병자 사람은 질병으로 신음할 때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실감하게 된다. 결국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록 죽음의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하여도 공포와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하느님께 원망하기도 한다. 반면에, 병고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히려 성숙하게 된다. 즉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의지하게 된다. 병고를 잘 받아들임으로써 일생의 잘못에 대한 보속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께 속죄의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며 남은 시간을 주님께 봉헌한다. 오래 동안 병석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의 고통은 참으로 크다. 인생 최후의 투쟁을 하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은 다음과 같다.
1) 죽음을 가져올 만큼 큰 아픔을 주는 육체적 고통 2) 아무도 고통을 덜어줄 수도, 동참할 수도 없어 혼자서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 고독 3) 사랑하는 사람, 정든 집, 아끼던 물건 등과의 뼈저린 이별 4)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정의로우신 하느님을 만나 뵙는 데에 대한 두려움 5) 자신의 나약함과 과거의 행로에 대한 부끄러움 6)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무너지는 자신의 무력함에서 느끼는 실망감 등
환자는 이렇게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병자는 육체의 힘이 모두 쇠진하였고, 따라서 판단력과 의지력도 약해졌으며 감정은 대단히 민감하게 되어 슬픔과 두려움에 빠지기 쉽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위로와 은총이다. 이 위로와 은총을 주는 성사가 병자성사이다.
병자성사의 효과 1) 생명의 은총[성화은총]을 더한다. 2) 죄와 죄벌을 사한다. 고백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든가 고백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 있다면 고백 없이도 통회로써 죄와 죄벌의 사함을 받는다. 3) 육신의 병을 낫게 한다.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될 경우에는 건강을 회복시켜 주거나 병고를 가볍게 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신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4) 병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하여 악의 세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굳세어지게 한다. 5)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게 하고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6)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방해하는 것들[재산, 자녀, 현세적 삶에 대한 애착]을 멀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을 준비하게 한다. |
| [ 제 4편 교회생활] 제1장 - 교회와 우리 |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골로 1,18)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한사람 한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神秘體)이고, 우리 각자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와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확실히 앎으로써 교회와의 유대관계를 친밀히 할 수 있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친밀하게 가질 수 있다.
제1절 교회(敎會)란? “교회”[ekklesia, 그리스어의 ‘ek-kalein’-‘밖으로 부르다’]라는 말은 ‘불러모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백성의 집회를 가리켰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회를 말하였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신자들의 초기 공동체는 스스로 “교회”(Ecclesia)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계승한다고 세상에 밝혔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극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교회로 “불러모으신다.” 아울러“Church”는“Kirche”의어원인“Kyriake”에서 생긴 말인데 “주님께 속한 모임”을 의미한다(교리서 751).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명에 의해서 소집된[지금 여기에 이룩된] 공동체인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교회는 ‘양 우리’ 혹은 ‘양떼’(요한 10,1-10), ‘하느님의 밭’, ‘하느님의 건물’(1고린 3,9), ‘하느님의 가족’(에페 2,19-20),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장막’(묵시 21,3), ‘구원의 배’, ‘성전’(聖殿), ‘우리 어머니’(갈라 4,26),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1고린 12,27) 등으로 표현되는 단체로서 세상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성부(聖父)와 교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해”(요한 11,52) 오랫동안 준비하셨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계약을 맺으시고(창세 15,18 참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기르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개별적 구원과 성화와 흠숭을 원치 않으시고 한 백성으로 구원되고 성화되며 당신을 믿고 섬기기를 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로 미리 준비하셨다. 성자(聖子)와 교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새 백성을 일으키기 위해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그리스도 안에 온 인류가 하나되게 하는 것]을 이루시고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교회]를 건설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사업을 계속하고 계신다. 모든 사람은 교회를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도록 불리웠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태어났고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가며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 성령(聖靈)과 교회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견된 성령께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안에서 그 생명이 되고 얼이 되신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고 교류와 봉사로 일치시키며, 교계제도와 갖가지 은사[카리스마]로써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신다. 성령께서는 복음의 힘으로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며 항상 새롭게 하시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성시키신다”(교회 4). 하느님의 백성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친히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페 1,22-23)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고, 하느님께 존경과 영광을 드리는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만민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성전이다(2고린 6,16;에페 2,21). 교회는 거룩하고 흠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고(에페 5,27),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요한 15,1-8), 한 목자 아래 한 떼가 되어 다시는 흩어지지 않으며(요한 10,11-16), 예언자들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은 새로운 계약에 의해 태어난 백성들의 모임이다(루가 22,20).
우리의 생활
1) |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교회 안에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흠없는 사람으로서 한 목자 아래 한 양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여 교회를 부(富)하게 만들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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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4편 교회생활] 제2장 - 하느님 교회의 특성 |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그 하느님을 예배하는 종교, 교파가 수없이 많고 그 많은 교파들이 서로 자기 교회만이 참종교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교회의 분열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뿐이고, 세상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뚜렷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교회이다. 우리는 이 특성을 살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1절 교회는 하나이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가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요한 10,16) 있기를 바라셨고, 성령께서는 여러 나라 사람들을 한데 모으심으로써 교회를 시작하셨다(사도 2,1-11 참고). 예수께서는 이 하나인 교회에 사랑의 계명[새 계명]을 주셨고, 이 교회가 하나 되도록 기도하셨다(요한 17,21-23 참고).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3-6)라고 교회가 하나임을 역설하였다. 하나인 가톨릭 교회 하느님은 유일하시며 나누일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 세우신 하느님의 교회는 하나뿐이며 일치된 교회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 어디를 가도 신앙상, 전례상, 행정상 하나이다.1) 믿음이 하나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나 같은 교리를 믿는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교도권(敎導權)을 가진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믿고 따른다. 즉 교황과 공의회가 가르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계시 10). 2) 전례가 하나이다. 모든 가톨릭 신자는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있다. “모든 전례의식(典禮儀式)은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성교회의 행위인 까닭에 가장 우월적(優越的)인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 있어서 성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도 같은 자리와 비중을 차지할 수 없다”(전례 7)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전례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를 수 없다. 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전례로써 일치된 모습을 보일 때 하느님은 기뻐하시고, 우리가 전례로써 표현하고 기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해 주신다. 더구나 “전례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성교회를 ‘이교 백성들을 위하여 세워진 깃발’로 드러내 보이며,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이 깃발 아래 함께 모여, 한 우리 안에 한 목자 아래 있게 한다”(전례 2). 3) 행정상으로 하나이다.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온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직책상으로 완전한 최상 전권(全權)을 가지며 언제나 자유로이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교회 22). 그러므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는 교황을 따르고 그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몬을 교회의 반석(磐石: 베드로)으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마태 16,18-19 참고), 그를 당신 양떼의 목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다(요한 21,15-19 참고). 가톨릭 교회는 교황과 그를 중심으로 한 사도단(使徒團:주교들)과 더불어 평화와 사랑과 일치의 유대를 가졌음을 자랑한다.
우리의 생활
우리는 단일유일(單一唯一)한 교회 안에 있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러한 교회의 일원답게 살아야 한다. | 1) | “교도권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은 이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교회 12). 따라서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과 윤리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그 진실됨을 보증하시므로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따라야 하겠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이다. | 2) | 일치된 전례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게 되고 이웃을 감동케 하며 자신의 마음을 열렬하게 한다. 우리는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교회에 속해 있음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알려야 한다. | 3) | 본당 신부와 일치된 본당교회, 교구장과 일치된 지역교회, 교황과 일치된 세계교회는 그 자체로서 외교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6-47).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순명과 봉사로써 자신을 교회에 일치시키고 일치된 교회의 모습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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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4편 교회생활] 제3장 - 교계제도 |
교회는 영적 이익을 위해 모인 단체이지만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승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기에 위계적(位階的)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회제도의 올바른 이해는 교회생활을 잘 영위하게 하며 자신과 이웃의 구원에 크게 도움이 된다.
제1절 교계제도의 설정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고 증가시키기 위하여, 즉 당신의 몸인 온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위계적 질서를 마련하셨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던 많은 이들 가운데 72명을 제자로 삼으시고, 이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특별히 뽑아 사도로 삼으시어(루가 6,13-15 참고) 하나의 단(團)을 형성하셨다. 그래서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반으로 한 자리가 비게 되자 사도들은 마티아를 선정하여 12명을 채웠다(사도 1,26 참고). 사도 바오로는 교회 안에 사도단이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고린 4,1). 안수로써 전해지는 직무수여 “성부로부터 축성되어 세상에 파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통하여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당신이 받으신 축성과 사명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이 주교들은 또 교회 안에서 여러 수하 사람들에게 여러 계층으로 자기 직무를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제정된 교회의 직무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수행하게 된 것이다. 옛부터 이들을 주교, 사제, 부제들이라 불러왔다”(교회 28). 이렇게 교회의 교계제도는 인위적으로나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 직접 설정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사목직이 교회 안에서 세상 끝날 때까지 계승되기를 바라셨고(마태 28,18-20), 사도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준 권한을 후계자들에게 안수로써 전해 주었다.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백성에 의해 선출되기도 하고(사도 6,3) 사도들에 의해 뽑히기도 하지만(디도 1,8) 직무수여는 안수로써 하였다(2디모 1,6). 초대교회에서 안수(按手)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을 실제로 부여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당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사도 20,28)라고 하였다. 교계제도에 의한 가톨릭 교회 교계제도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체제의 기본이며 성품권(聖品權:Ordo)과 재치권(裁治權:Jurisdictio)을 갖는다. 성품권에 의한 교계제도는 성품성사로 이루어지는 주교, 사제, 부제 세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치권에 의한 것은 사목에 관련되는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지는 교황과 주교이다. 그러나 이 재치권은 부분적으로 사제와 부제에게도 위임될 수 있기 때문에 교계제도는 모든 계층의 성직자들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계제도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교회 조직의 제도적 질서이다. 한국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성직 지위가 있다. 추기경(樞機卿)은 교황 다음의 성직 지위에 있는 주교로서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의 자문에 응하며, 교황 선출권을 갖는다. 아울러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갖는다. 대주교(大主敎)는 대교구의 주교로서 관구회의에 주교들을 소집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관구 내의 주교가 내린 판결에 대한 첫 상소심을 주관한다. 그러나 다른 사목, 행정에는 관여할 수 없다. 몬시뇰은 ‘나의 주인’이란 뜻으로 원래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이다. 주교품을 받지 않은 성직자로서 덕망이 높아 교황으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는 경우도 있다. 사제와 부제는 제3편 7장 성품성사에 기술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1)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공포를 일으켜 주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직명(職名)이요 후자는 은총의 이름이며,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성품권을 받은 성직자들이 형제들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에 속하여 그리스도 신자의 품위를 갖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질서있게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여 마침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교회 18). 하느님의 백성을 용이하고 안전하게 하느님께로 이끌어가기 위해 설정된 교계제도와 교직에 헌신 봉사하는 목자들을 기쁘게 따르고 받아들여야 한다. | 2) | 예수께서 교계제도를 설정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한 우리 안에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세상을 정복하고 악의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질서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어야 한다. 즉 목자의 지도에 성실히 따라야 한다. | 3) | 교회의 승리는 바로 나의 승리이다. 평신도 각자가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교회는 강해지고 교계제도는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세상 구원에 더욱 이바지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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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4편 교회생활] 제4장 - 평신도 사도직과 단체생활 |
교회는 영적 이익을 위해 모인 단체이지만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승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설립되었기에 위계적(位階的)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회제도의 올바른 이해는 교회생활을 잘 영위하게 하며 자신과 이웃의 구원에 크게 도움이 된다.
제1절 교계제도의 설정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고 증가시키기 위하여, 즉 당신의 몸인 온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위계적 질서를 마련하셨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던 많은 이들 가운데 72명을 제자로 삼으시고, 이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특별히 뽑아 사도로 삼으시어(루가 6,13-15 참고) 하나의 단(團)을 형성하셨다. 그래서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반으로 한 자리가 비게 되자 사도들은 마티아를 선정하여 12명을 채웠다(사도 1,26 참고). 사도 바오로는 교회 안에 사도단이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고린 4,1). 안수로써 전해지는 직무수여 “성부로부터 축성되어 세상에 파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도들을 통하여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당신이 받으신 축성과 사명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이 주교들은 또 교회 안에서 여러 수하 사람들에게 여러 계층으로 자기 직무를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제정된 교회의 직무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수행하게 된 것이다. 옛부터 이들을 주교, 사제, 부제들이라 불러왔다”(교회 28). 이렇게 교회의 교계제도는 인위적으로나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 직접 설정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사목직이 교회 안에서 세상 끝날 때까지 계승되기를 바라셨고(마태 28,18-20), 사도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준 권한을 후계자들에게 안수로써 전해 주었다.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백성에 의해 선출되기도 하고(사도 6,3) 사도들에 의해 뽑히기도 하지만(디도 1,8) 직무수여는 안수로써 하였다(2디모 1,6). 초대교회에서 안수(按手)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을 실제로 부여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는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당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습니다”(사도 20,28)라고 하였다. 교계제도에 의한 가톨릭 교회 교계제도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체제의 기본이며 성품권(聖品權:Ordo)과 재치권(裁治權:Jurisdictio)을 갖는다. 성품권에 의한 교계제도는 성품성사로 이루어지는 주교, 사제, 부제 세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치권에 의한 것은 사목에 관련되는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지는 교황과 주교이다. 그러나 이 재치권은 부분적으로 사제와 부제에게도 위임될 수 있기 때문에 교계제도는 모든 계층의 성직자들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계제도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교회 조직의 제도적 질서이다. 한국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성직 지위가 있다. 추기경(樞機卿)은 교황 다음의 성직 지위에 있는 주교로서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의 자문에 응하며, 교황 선출권을 갖는다. 아울러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갖는다. 대주교(大主敎)는 대교구의 주교로서 관구회의에 주교들을 소집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관구 내의 주교가 내린 판결에 대한 첫 상소심을 주관한다. 그러나 다른 사목, 행정에는 관여할 수 없다. 몬시뇰은 ‘나의 주인’이란 뜻으로 원래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이다. 주교품을 받지 않은 성직자로서 덕망이 높아 교황으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는 경우도 있다. 사제와 부제는 제3편 7장 성품성사에 기술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1)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공포를 일으켜 주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한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직명(職名)이요 후자는 은총의 이름이며,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성품권을 받은 성직자들이 형제들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에 속하여 그리스도 신자의 품위를 갖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질서있게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여 마침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교회 18). 하느님의 백성을 용이하고 안전하게 하느님께로 이끌어가기 위해 설정된 교계제도와 교직에 헌신 봉사하는 목자들을 기쁘게 따르고 받아들여야 한다. | 2) | 예수께서 교계제도를 설정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한 우리 안에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세상을 정복하고 악의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질서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어야 한다. 즉 목자의 지도에 성실히 따라야 한다. | 3) | 교회의 승리는 바로 나의 승리이다. 평신도 각자가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때, 교회는 강해지고 교계제도는 더 큰 힘을 발휘하여 세상 구원에 더욱 이바지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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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편 수계생활] 제 1장 - 법의 주체 |
어떠한 단체이든 그 단체를 유지 혹은 발전시키기 위한 법을 가지고 있다. 구성원들이 어떤 목적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그 단체의 법 규정이 결정지워진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개선할 때까지 지켜야 할 법이 있다. 우리는 이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법 준수의 주체인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1절 법을 지키는 사람 세상만물은 그 나름대로 필요한 질서와 법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도 살아 번성하고 완성되기 위한 질서와 법이 있으므로 이를 존중하고 실천해야 한다. 더욱이 하느님 모상을 닮은 인간, 자유와 이성을 갖춘 인간,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이 지상 세계가 아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인간 모두는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하느님 나라에 도달해야 하므로 질서와 법이 필요하고 이를 존중하고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 사람은 본성상 하느님을 닮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 1,26-27).
이 말씀은 사람이 영육을 가진 존재로서 하느님을 닮아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을 초월하고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지적한다.
사람은 초자연적인 면에서 하느님을 더욱 닮았다.
1)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다”(2고린 3,18).
2)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른 새 인간이 된다 (골로 3,10 참고). 우리는 세례로써 그리스도를 닮고 하느님의 자녀, 즉 새 사람이 된다.
3)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닮아 있는가? 하느님께 모습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을 가져 하느님처럼 산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사랑하면서 사신다. 우리도 사랑하면서 살 때 하느님을 닮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참아들[본성상]이시고 우리는 양자 결연으로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도 누리게 될 것이다(로마 8,14-17 참고).
4)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며(로마 5,5 참고), 성전에 계시듯이 우리 안에 사신다(1고린 3,16 참고). “사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 8,9).
5)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한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지식과 사랑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지나 훗날에는 지복직관(至福直觀) 속에서 하느님의 지식과 사랑을 나누어 받는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 동화되고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고 있다.
우리의 생활 1)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나라에 부르시며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신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기꺼이 감사와 사랑으로 보답해야 한다. 2) 우리가 이렇게 고귀하게 불리웠으니 이에 맞갖고 품위있는 행위로 우리를 완성해 가야 한다. 우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주신 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뜻[법]을 따라야 한다. |
| [제 5편 수계생활] 제2장 - 윤리규범 |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선물인 지성과 자유를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은 원죄로 인해 악에로 기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생활에 옮겨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바르게 살 수 있게 하는 생활의 규범을 주셨다. 우리가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가를 규정짓는 규범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객관적 규범으로서 도덕률(道德律)이요 다른 하나는 주관적 규범으로서 양심(良心)이다.
제1절 법의 종류 법은 질서를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고 규범으로 구속력(拘束力)을 주는 어떤 의지(意志)가 있다. 도덕률이란 하느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인간의 자유행동을 규제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직접 명하신 것을 신법(神法)이라 하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권위를 통해서 간접으로 선포하신 것을 인정법(人定法)이라 한다. 신법(神法=永遠法) 신법은 전 우주를 지배하는 법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법은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운동을 소정의 목적으로 이끄시는 신적 예지(神的叡智)의 의도(意圖)이다”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와 당위(當爲)에 하나의 결정적인 질서를 마련하실 때 이것이 신법이 되고 이 법이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신법의 하나로서 사물의 본질 속에 자리잡고 있어 그 존재의 본성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법은 모든 법의 원천이 되고 모든 법의 권위는 이 신법에 근원을 두며, 모든 교회법과 국법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근거가 된다. 신법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을 자연도덕률(自然道德律)이라 하고, 계시를 통해 공포된 것을 신적 실정법(神的實定法)이라 한다. 신법은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기본법(基本法)으로서 사회적,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교회는 신법의 범주 안에서 신법의 권위를 가지고 신법의 구체적 적용을 위해 법률을 제정한다. 국가는 자연법 영역 속에서 신법의 권위에 입각하여 온 국민을 위하며 온 국민에게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자연도덕률(自然道德律) 도덕률이란 하느님의 의지의 표현으로서 인간의 자유행동을 규제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하면서 능동적으로 자연법에 참여한다. “자연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이 무엇이며, 진리와 거짓이 무엇인지를 이성으로써 식별할 수 있게 하는 타고난 도덕의식의 표현이다”(교리서 1954). “자연법의 주요한 규정들은 십계명에 제시되어 있다”(교리서 1955). “자연법은 역사의 변동을 거치면서도 불변하고 영속하며, 사상과 풍속의 흐름 속에서도 존속하며 그 사상과 풍속의 진보를 뒷받침한다”(교리서 957). 따라서 자연법은 다른 모든 법의 토대가 된다. 신적 실정법(神的實定法) 신법 중에 구원경륜 안에서 초자연적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직접 계시된 법이 신적 실정법이다. 이 실정법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하느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 구약의 율법이고,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주신 법이 그리스도의 새 계명, 즉 사랑의 법이다. 구약의 율법:하느님께서 은혜로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에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다. 모세를 통하여 반포된 신법의 내용은 모세 5경에 실려 있다. 이것을 ‘모세의 율법’ 혹은 ‘토라’(Torah:지혜 혹은 가르침)라고 하였다. 토라에는 윤리규범뿐만 아니라 법령집(출애 21,18-22)과, 전례법(출애 34,17-27)이 있다. 이 모세 5경의 중심은 계약이고, 그 계약의 조건은 십계명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것을 행하기 위한 성령의 능력과 은총을 주지는 못하였고, 죄를 고발하고 드러내 주는 구실을 하였을 뿐이다(교리서 1963 참고). 신약의 법[복음의 법]: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법을 완성하셨다. 십계명과 중대한 계율들을 새롭고 완전하게 근본적으로 보완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하심으로써 새 생활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새로운 행동규범을 부여하신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삶의 행동규범이 되고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우리 마음에 박아 주신 것으로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다. 즉 외부에서 오는 법은 무엇이 당위(當爲)인가를 지적해 주는 데서 그치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그것을 수행하려는 의지와 수행할 능력까지 내포하고 있다. “복음의 법은 성령의 업적이니, 성령을 통하여 이 법이 사랑의 내적인 법이 된다”(교리서 1965). “새 율법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하여 신자들이 받게 되는 성령의 은총이다”(교리서 1966). 복음의 법은 산상수훈(행복선언)이나 사도들의 윤리적 권고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5편 5장 1절 참고]. 인정법(人定法) 우리에게 자연도덕률이 있고 계시된 하느님의 법이 있지만 사람들이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공동선 때문에 공동체를 올바로 지배하기 위하여 인정법이 요구된다. 즉 신법을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인정법이 필요하다. 인정법은 두 가지가 있다. 국가 단위로 정하는 시민법이 있고, 교회가 정하는 교회법이 있다.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만든 인정법이 올바른 법률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신법에 위배되지 않고 둘째, 공동선에 분명히 기여하며 셋째, 평범한 인간의 능력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법은 준법자의 양심을 구속하며 윤리적 의무를 지운다. 윤리적 의무란 법률을 준수할 의무와 이를 위반했을 경우 형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
| [제 5편 수계생활] 제3장 - 십계명 |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직접 계시하신 실정법으로서 구약의 모든 법의 요약이며 현대의 사회질서의 대헌장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양심의 소리에 따라 지켜야 할 윤리규범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 즉 가족, 사회, 경제, 사법 등의 시민생활을 규제하고 있다(출애 20,1-17 참고).
제1계 하느님을 흠숭하라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섬겨라”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느님을 흠숭하고 섬겨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를 이렇게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0). 따라서 첫째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한결같으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항상 동일하신 분, 성실하고 온전히 의로우신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전능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호의와 애정을 생각하면, 누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성서는 계명의 시작과 끝에 하느님께서 ‘나는 주님이다’라는 표현을 쓰신다(교리서 2086 참고). 하느님께 대한 흠숭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교리서 2096 참고). 하느님께서는 이 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사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신명 5,9-10). 그러므로 어떠한 것이라도 하느님보다 위에 모실 수 없고 더 귀하게 여길 수 없으며 더 마음을 빼앗겨도 안 된다.
제1계에 관련된 금지사항 1)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공경하는 것 - 부처상이나 우상, 그리고 해, 달, 바위, 나무 등에 존경을 표시하는 것 - 잡신[삼신, 토지신, 바다신 등]이나 조상의 영혼을 흠숭하는 것 - 무당을 데려다 굿하는 것 2) 하느님 아닌 것에 의지하여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 - 점술, 철학관, 도사 등에게 무엇을 물어보는 것 - 수상(手相), 관상(觀相), 사주(四柱), 궁합(宮合) 등을 보는 것 - 풍수설(風水說), 정감록(鄭鑑錄), 토정비결(土亭秘訣) 등을 믿는 것 3)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 - 사람 모독 : 성직자나 수도자를 모독하는 것(교회법 1370조) - 장소 모독 : 성당이나 교회묘지를 모독하는 것 - 물건 모독 : 성서나 성물(聖物)을 모독하는 것 4)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는 것 - 절망하는 것 : 절망은 하느님의 선하심, 약속에 성실하신 그분의 의로우심,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거스른다(교리서 2091 참고). - 자만하는 것 : 자만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든가 회개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과신한다(교리서 2092 참고). - 무관심하는 것 : 무관심은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 사랑의 힘을 부인하는 것이다 (교리서 2094 참고). - 배은(背恩)하는 것 : 배은은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사랑으로 보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교리서 2094 참고). - 냉담하는 것 : 냉담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주저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며, 사랑의 활력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교리서 2094 참고). - 영적 게으름을 부리는 것 : 게으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기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교리서 2094 참고). - 하느님을 증오하는 것 :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죄를 엄히 다스리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 여겨 저주하는 것이다(교리서 2094 참고). -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나 무신론(無神論) 등에 동조하는 것 - 유다교적 의식을 도입하는 것 - 거짓 기적, 발현, 예언을 주장하고 선전하는 것 - 교구 직권자의 허락없이 타종교나 타교파의 집회에 참가하는 것 - 부모가 자녀를 비가톨릭 종교에서 세례받게 하거나 교육시키도록 내어주는 것(교회법 1366조 참고)
우리의 생활 1) 우리가 직접 잡신을 섬긴다든가 우상숭배나 점술 등으로 하느님을 모독하지는 않는다 해도 자신의 지혜, 건강, 아름다움, 욕정, 행복, 재산, 권력, 가족 등을 하느님보다 더 섬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 [제 5편 수계생활] 제4장 - 교회법 |
교회법은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와 그 활동을 규정한 인정법이다. 교회법은 신자들의 행동을 교회의 외적, 사회적 질서로 다루기 때문에 교회법의 규범을 범할 때는 범죄하게 되고 외적 판결과 법적 제재가 따르게 된다. 현행 교회법은 총 1752조로 되어 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3년 1월 25일에 선포하여 1983년 11월 27일부터 발효되었다. 교황은 이 법을 선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 교회법전은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회는 사회적이고 가시적 조직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규범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교계 제도와 조직의 구조가 가시적이기 위함이고, 하느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직무, 특히 거룩한 권한과 성사가 올바르게 집행되기 위함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상호 관계와 각 개인의 권리가 안전하게 보장되고 제정되어 사랑에 입각한 정의에 따라서 조화될 수 있기 위함이고, 끝으로 더 거룩하게 그리스도교인 생활을 살기 위해 취해진 공동체적 노력이 이 교회 법규에 의하여 유지되고 강화되며 증진되기 위함이다”.
제1절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본 권리와 의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 그리고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여, 하느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각자의 조건에 따라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 교회는 세상에 하나의 사회로 구성되고 조직되었으며,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결합된 주교들이 다스리는 가톨릭 교회이다. 세례받은 이들은 가톨릭 교회에 온전히 결합되어 신앙을 고백하고 성사를 받고 교회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교회법 204-205조 참고). 예비신자 예비신자들은 특별한 양식으로 교회와 관계를 맺는다. 성령의 인도로 교회에 합체되기를 열망하는 예비신자들은 바로 이 원의와 믿음, 희망, 사랑의 생활로써 결합되어 있다. 교회는 예비신자들을 위해서 특별한 배려를 한다. 그들을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고 거룩한 전례에 이끌며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이 누리는 여러 가지 특은을 그들에게도 베푼다(교회법 206조 참고). 성직자와 수도자 교회 안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성직을 맡은 이들이 있다. 이들을 성직자라 하고 그 외의 신자들을 평신도라 한다. 수도자는 성직자나 평신도 중에서 교회가 인정하고 승인한 서원 혹은 거룩한 약속을 함으로써 복음적 권고를 실행하기로 서약하여 특수한 모양으로 하느님께 헌신하고 교회의 구원 사명에 공헌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의 신분은 교계조직에는 상관이 없지만 교회의 생활과 성덕에 상관된다(교회법 207조 참고). 평신도 평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그 품위에 있어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 따라서 평신도는 각자 자기의 조건과 임무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데 기여함으로써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된다.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교회와 일치하여 생활함으로써 세계교회와 일치를 이루며 교회를 위해 해야 할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각자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교회의 발전과 성화를 위하여 성심 성의껏 노력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평신도들은 세례와 견진으로 사도직 사명을 받았으므로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하느님의 구원소식을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전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자기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전해 줄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전교해야 할 의무가 더욱 커진다. 평신도들은 각자 자기 능력과 조건에 따라 현세 제도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침투시키고 이를 생활화할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 또한 그 사명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을 처리하거나 사회 직책 수행에 있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만큼 다양하고 폭넓은 것이다(교회법 208-211조;225조 참고). 평신도와 목자와의 관계 평신도들은 자기 의무를 의식하면서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거룩한 목자들이 신앙의 스승으로서 선언하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법에 따라 결정한 바를 그리스도교적 순명 정신으로써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목자들에게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 특히 영적 도움을 청하고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영적 도움이란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받는 부를 가리킨다. 한편 자기들의 학식과 능력과 지위에 따라 교회에 필요하고 유익한 일에 자기 의견을 표명함으로써 목자들을 도울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경우 신앙과 도덕과 목자들에 대한 존경 및 공동선과 인격 존중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교도권에 합당하게 순종하면서 자기 전문분야를 연구하고 자기 견해를 현명하게 밝힐 자유가 있다(교회법 212-213조;218조 참고).
영적 생활의 권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법에 의하여 다음의 권리들을 갖는다. 교 육 | 세례로써 복음의 가르침에 맞갖은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인격 성숙을 추구하며 동시에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이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교 교리를 따라 생활하고 이를 선포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옹호하고 사도직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각자의 능력과 조건에 적합한 교리지식을 배울 의무와 권리가 있다(교회법 229조 1항 참고). 교회의 대학교나 대학 또는 교회 학문연구소에서 강의를 듣고 학위를 얻음으로써 거룩한 학문의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연구할 권리가 있다(교회법 229조 2항 참고). | 전 례 | 합법적 교회의 목자들이 인준한 전례규정을 따라 하느님을 공경하며, 교의에 합치하는 한 자기 방식의 영적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 평신도들이 필요한 자격을 갖춘 경우 독서직과 시종직에 기용될 수 있다(교회법 230조 1항 참고). 또한 일정기간 동안 위임받아 독서자, 해설자, 선창자 등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교회법 230조 2항 참고). | 모 임 | 애덕이나 신심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그리스도교 성소를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고 운영하며 그 목적을 공동으로 달성하기 위한 모임을 가질 권리가 있다. | 사도직 | 평신도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각자의 신분과 조건에 따라 독자적인 기획으로 사도직 활동을 증진시키거나 지원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권리행사이든 가톨릭 명칭을 사용할 경우 교회 관할권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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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은 권력행사에 법규범을 따라 협력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역공의회(교회법 443조 4항 참고), 교구 대의원회의(교회법 463조 1-2항 참고), 사목평의회(교회법 511조;536조 참고) 등에 평신도들이 참여하고, 본당 사목구의 사목수행(교회법 517조 2항 참고)에서 연대책임을 지고, 재무평의회에 협력하며(교회법 492조 1항;536조 참고), 교회법원에 참여(교회법 1421조 2항 참고)한다.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자기의 권리를 행사할 때에는 교회의 공동선과 타인의 권리와 타인에 대한 자기의 의무도 고려해야 한다. 교회 권위는 공동선을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고유한 권리 행사를 규제할 수 있다(교회법 214-217조;223조 참고). 교회법 중 평신도들의 중대한 의무는 미사참례의 의무, 속죄행위를 할 의무, 고해성사의 의무, 영성체의 의무, 혼인법을 지킬 의무, 경제적 의무 등이다[제2절~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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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편 수계생활] 제5장 - 그리스도의 법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건설하신 하느님 나라의 법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법은 구약의 모든 법을 완성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님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몸소 사랑의 생활을 하셨고 지금도 이 사랑을 우리에게 심어 주시기 위해 성사와 말씀 안에 살아 계신다.
제1절 하느님 나라의 헌장 예수님은 세례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헌장(憲章)인 ‘여덟 가지 행복’[幸福宣言]을 가르쳐 주셨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때 이 여덟 가지 행복의 정신을 생활화할 수 있다. 또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의 동기를 세상의 판단 기준과는 다르게 가져야 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새 사람으로서 새 나라를 건설하는 그리스도인은 새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행복선언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형시킬 수도 없고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없다”(교회 31)고 공의회는 가르친다. 이 하느님 나라의 헌장은 하느님을 갈망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에게 크나큰 격려이다. 여덟 가지 행복(마태 5,3-11)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난 자체를 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신을 가지라는 뜻이다.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릴 때 하늘 나라를 이 세상에서부터 미리 누리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태도는 하느님 나라의 부를 누리게 한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슬퍼하고, 자기가 고통 당하는 이유를 참으로 깨달아 슬퍼하고, 이웃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은 새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며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위로로써 행복하게 될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이란 자기의 처지[환경]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불평불만을 품지 않으면서 그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 개발에 힘쓰는 사람이다. 이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내와 관용으로 그 부족함을 감싸 주고 채워 줄 수 있기에 이들이야말로 인생의 승리자이고 땅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며 행복한 사람들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옳은 일이란 정의, 거룩함, 완전함을 뜻하고 올바름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옳은 일을 갈망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며, 그는 완성에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므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과욕과 부정으로 자신을 채우려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기의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가진 자이고 가진 바를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복된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당신의 은총을 더 베푸신다. 우리는 남에게 물질, 힘, 정(情), 시간을 줄 수 있고 관심과 용서와 친절을 베풀 수 있다. 받을 줄만 아는 사람에서 벗어나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참으로 가진 자가 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재미있어 하고 또 거기에 보다 더 마음을 두게 된다. 관심을 두면 둘수록 더 집착하게 되고 더 재미있어 하고 더 잘 보게 된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느님의 일에 더 기울이느냐 세상 일에 더 기울이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을 뵙게 되느냐 혹은 뵙지 못하느냐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보존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여 하느님을 뵙는 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평화는 자신이나 이웃,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는 스스로 이룩하려고 노력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평화를 바라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이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기 때문에 좀처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주위의 소란이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성령께서 주신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러한 평화를 초래한다. 하느님과 일치된 사람은 하느님의 복된 자녀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를 실천하기를 두려워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박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대로 언젠가 그들의 옳음은 인정받게 될 것이고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진리와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비록 세상의 배척을 받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아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 세상의 지식만으로는 이 ‘여덟 가지 행복’을 이해하기 힘들고 실천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앙인은 ‘나와 세상’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신앙을 생활화하여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의 ‘여덟 가지 행복’을 실천해야 한다. 이 여덟 가지 행복의 정신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