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권리와 자연의 권리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인권’이라 한다면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자연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권을 침해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대사건들은 거의 대부분 인권침해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러시아혁명, 동학농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배층의 무자비한 인권탄압에 대해 피지배 계층이 폭력적으로 반응한 것에 다름 아니다.
얼마 전 장마 피해 지역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나는 인간의 교만함에 의한 자연의 경고라고 생각되었다. 본래 물이란 지형의 굴곡진 형태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것을 인간들이 개발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제멋대로 깎고, 막고, 붙이고 하다 보니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한 자연이 폭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콘크리트 방벽이 사나운 물살에 의해 처참하게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교훈을 얻기보다는 오기가 발동한 인간들은 피해를 복구한다며 더 두꺼운 콘크리트 옹벽을 구축하고 있다. 피해를 복구하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옹벽을 세우면 세울수록 물의 유속은 빨라지고 그것은 강줄기의 굴곡면에 위태롭게 들어선 도로방벽을 더욱 세차게 내려칠 것이다. 마치 인간과 자연의 힘겨루기를 하는 것 같았다.
길을 내고 다리를 놓더라도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공간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은 스스로 물의 양과 속도를 조절한다. 인간의 지나친 간섭과 침탈이 피해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개발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개발을 하되 자연권의 침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자연과 타협하자는 말이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보면 알겠지만 지금 한국의 산과 들은 그야말로 몸살을 앓고 있다. 좁은 땅덩어리에 마치 거미줄을 치듯 도로를 건설했다. 심지어 어느 지역은 좁아터진 해안가에 세 번째 도로를 건설하려고 개발 전에 갖고 있던 절경을 다 망가뜨렸다.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자하는 셈법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 해서 자연이 망가지면 과연 관광객이 지속적으로 올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마음이 든다.
내가 몇 년동안 살았던 연천지역은 소위 요즘 표현으로 뜨고 있는 지역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발이 덜 되어서 자연을 나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기간동안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어서 개발을 하지 못했던 것이 자연의 본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인위적인 것보다는 원시적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자연이 살아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태풍이나 장마는 인간의 논리로 자연을 멋대로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자연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 살아 있는 인간과 타협을 통해 일을 처리하듯이 자연을 대할 때도 타협을 하는 자세가 정말로 필요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