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깨어 있어라
보좌신부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제로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주임 신부님께 식사를 하면서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신부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나의 돌발적인 질문에 신부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식사를 하시다가 “늘 자신과 주변을 상대로 깨어 있어야겠지.”하고 답변하셨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우문 같지만 젊어서 너무 일찍 자신과 세상을 깨달으면 세상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 그러자 주임 신부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고민이다. 이런 고민을 평생동안 하면서 살았던 러시아의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의 본질은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한 시골의 초라한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객사하기까지 우여곡절의 삶을 살았다. 그가 깨달은 인생의 의미란 오직 ‘선에 대한 끝없는 갈망’에 있었다. 또한 이 선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초라한 임종을 맞이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였다.
복음을 통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이 말씀을 풀이해보면 우리말에 ‘조심하다’는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쓰는 것과 마음에 새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깨어 있다’는 온전한 정신 상태로 세상을 돌아보고 잠, 꿈 따위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강조하고 계시는 ‘깨어 있음’은 더욱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무작정 미래를 기다리고, 지나간 과거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깨어 있어있다는 것은 오히려 현재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정확하면서도 거룩하고 위대한 기다림의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상태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지금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가진 것,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올바르게 깨어 있음'의 시작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 너무 기대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그리워하는 신앙인은 행복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마음은 어떤가? 혹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깨어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으면 된다. 설사 그것이 나 자신이 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