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아멘”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용서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잘못을 했을 때 몇 번을 용서를 해주어야하느냐고 숫자의 개념으로 물었다. 용서를 숫자로 한정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용서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고 싶어서 적당한 숫자를 제시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의 상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아기는 손에 잡히는 것들은 아무거나 입으로 가져간다. 그래서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을 지켜보고 계실 거란 생각을 해본다. 이유는 하느님 눈에는 우리가 아기와 다름없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입으로 모든 것들을 가져가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무조건 복을 청하면서 살고 있다. 청하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돈과 명예와 권력처럼 하느님이 보시기에 매우 위험한 것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사람이 그것을 좋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것 대신 절제를 통한 평화를 주시지만, 인간은 그런 하느님을 싫증을 내면서 냉담해진다.
진정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은 하느님을 잘 모르고, 하느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을 진정으로 누릴 줄도 모른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큰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 때문에 결국엔 배신까지 당하셨다.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났고, 이제는 인간 세상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다투면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차지하고 남용하여, 인간 세상을 미움과 시기, 질투 그리고 분노와 좌절의 삶을 살고 있다. 하느님은 이처럼 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오셨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다정한 음성이 되어, 따뜻한 손길이 되어 오셨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바로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인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이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셨음을 선언하시고, 당신의 일을 힘차게 해 나가셨다. 당신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며 그들을 열심히 찾아다니셨다.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나서 병에 걸렸다고 외면당하는 병자에게 용서와 치유를 베푸시고,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창녀에게 천국을 약속하시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오직 돈만 벌었던 욕심쟁이 세관장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당신을 배반한 허풍쟁이 세관장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당신을 창으로 찌르고, 침을 뱉으며, 모욕하는 로마의 병사 들도 용서를 해주셨다.
우리는 용서를 받은 사람 들이다. 하느님을 부정하고, 이웃을 부정했던 우리가 예수님 안에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죄 많은 사람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안아 주셨다. 그래서 우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그 누군가를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 많고 무거운 죄를 용서받았는데 우리가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조건 없이 이웃을 용서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숫자의 개념보다 더 중요한 “아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