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식대와 밥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3-12-21 05:10 조회수 : 68
헌식대와 밥
어제는 눈이 제법내렸다. 나에게 눈하면 항상 연천이 떠오른다. 겨울이면 지겨울 정도로 눈도 많이 왔고 직원들과 함께 열심히 눈을 치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학교와 사제관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집 근처에는 산짐승들과 새들이 유독 많았다. 밤이 되면 멧돼지와 고라니가 다니는 소리가 났고 밤새도록 소쩍새와 부엉이는 울어댔다. 지금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새들과 짐승들을 위해서 곡식이나 밥을 짐승이 다닐만한 장소에다 뿌려놓거나 그릇에 담아주었다. 그러면 숲 속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맛있게 쌀이나 밥을 쪼아 먹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절에 가보면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헌식대가 있다. 헌식대란 절 가까이 사는 새나 짐승을 위해 음식을 일부러 놓아두는 장소를 말하는데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그루터기를 이용하기도 하고, 일부러 화강암으로 멋지게 만들어 놓기도 한다. 먹이를 구하기 힘들어하는 시기에 동물들이 굶주리지 않게하기위한 배려인 것이다. 그런데 여러 동물들이 이용하다보니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질 때가 있다. 하지만 새나 동물의 눈으로 보면 그 지저분하게 보이는 밥알이나 쌀도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도 인간의 기준에 의한 것이니 배고픈 동물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밥은 원래 인간이 먹기 위한 것이기에 밥그릇에 담겨 있어야 제 값어치를 한다. 아무리 방금 지은 밥이라도 개밥 그릇에 담기면 그 순간부터는 개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다가 바닥에 흘린 밥을 잘 주워 먹지 않는 것도 더럽고 불결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밥이 제자리를 벗어나면 이미 밥으로서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깊은 계곡의 바위 밑에 버려진 밥이나,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바닷가에 버려진 흰 쌀밥이나, 남의 집 대문 앞에 놓여진 제삿밥이 소중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더럽고 추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제 자리에 있기 마련이고 제 자리에 있을 때 쓰임새가 정해지고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도 간장 종지에 설렁탕을 담지 않고, 설렁탕 뚝배기에 간장을 담지 않는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도 자기 본연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된다. 뚝배기에는 설렁탕이 담겨져 있어야 제 값어치를 하는 것처럼 진정한 인간이라면 자기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자리의 소중함을 알고 본연의 행실을 충실하게 행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