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은 부끄럽다
몇 년 전에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안녕하세요, 신부님!”이라는 꼬맹이들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다보니 복사들 몇 명이 서 있었다. 분명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라서 "왜 학교에 안 갔어?"하고 물었더니, 개교 기념일이어서 학교에 안 가고 친구들하고 목욕탕에서 수영하기 위해서 왔다고 대답을 크게 했다. 알몸으로 있는 나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내 알몸을 본 아이들의 입막음을 위해서 목욕이 끝나고 짜장면을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목욕탕이라고는 하지만 지인들이나 신자들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어색하고 부끄럽다.
성경에도 알몸 사건이 나온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은 하와가 건네준 과일을 먹고 자신이 알몸인 것을 깨닫고는 그것을 드러내기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랑하는 아내가 과일을 주는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과일을 먹고 자신이 알몸이었다는 알아차린 순간 무엇인가 크게 잘못됨을 직감했을 것이다.
목욕탕에서도 알몸이 부끄러운데 햇살이 눈 부신 정원에서 알몸이었으니 왜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목욕탕에서 알몸과 성서에 나타난 아담의 알몸은 그 뜻과 내용이 같을 수는 없다. 목욕탕의 알몸은 단지 감싸고 있던 옷을 걸치지 않은 외적인 것이지만 성서에 나타난 아담의 알몸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빼앗겨 버린 내적인 부끄러움이요 죄스러움이었다.
하느님께서 금지했던 과일을 따 먹었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주셨던 사랑과 은총의 질서를 일방적으로 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를 자신도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유혹 때문에 깨뜨리게 된 것인데, 이는 최초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가진 권한과 능력을 누려보겠다는 일종의 쿠데타 같은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질서를 깨뜨린 아담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마저도 빼앗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세상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녀야 하듯 인간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 한 가정도, 한 사회도, 한 국가도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질서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이 질서를 깨뜨렸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 질서 안에서 충실하겠다는 약속이며 질서는 상대방을 구속하기 위함이 아니고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혹에 걸려 넘어져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일시적으로 깨뜨릴 수 있지만, 믿음은 깨어진 질서를 다시 회복시켜 줌으로써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되게 한다. 알몸은 부끄럽다. 옷을 벗어 버린 목욕탕의 알몸도 부끄러운데 하느님과의 질서를 깨뜨림으로써 하느님과 은총을 빼앗겨 버린 알몸은 얼마나 더 부끄러운가! 성실한 마음으로 깨어진 질서를 회복하고 부끄러운 알몸에 은총의 옷을 입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