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신부님의 묵상글

입술만 신부, 발바닥만 신자

작성자 : 대림동성당 작성일 : 2024-01-15 03:44 조회수 : 92

입술만 신부, 발바닥만 신자


주일 새벽 미사 후에 신자 한 분이 급하게 면담을 요청하셨다. 5분이면 된다고 해서 집무실에서 잠깐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가방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시면서 시골 성당 건축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면서 나를 주고 가셨다. 봉투 안에는 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봉투를 받아서 내 방에 있는 예수성심상 앞에 놓고는 봉투와 성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주님께서 착한 신자를 통해서 입술만 신부인 나를 깨우쳐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부가 된 지 어언 삼십 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여태껏 입술만 신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과 강론만 그럴듯하지, 사는 모습은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주어도 여전히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른 신부들보다 믿음이 강하지도 못하면서도 신앙심이 강한 척, 기도를 게을리하면서도 매사에 주님께 매달리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척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아왔으니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위선적인 삶을 산다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하지만 엄밀하게 내 삶을 성찰해 볼 때마다 그동안 주님과 너무 멀리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스위스에서는 해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 ‘사스나스’라는 축제가 열린다. 사순시기에는 음식과 유흥을 절제하고 여러가지 고신극기에 전념해야 하니 그 이전에 실컷 먹고 즐겨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축제다. 이때 등장하는 슬러건이 있는데 ‘하느님은 가면 뒤를 보신다.’이다.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남들에게 보여지고 있는 표면적인 삶을 넘어서 진솔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자는 의미이다. 아무리 훌륭한 전례와 풍습이라도 우리들의 진솔한 마음이 충분히 반영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화려한 축제와 예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은 의견차로  자주 충돌한다. 외형적인 것을 중시하는 율법학자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때로는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마음보다는 남에게 보여지는 외형적인 장식과 위엄을 더 중시한다. 하지만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데 손만 깨끗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이 추구하는 권위가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권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 말씀처럼 더러운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흙이나 먼지, 기생충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생하는 음행, 간음, 탐욕, 시기, 교만과 같은 마음의 쓰레기들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 자신이 쓰고 싶은 가면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도 아직은 입술만 신부지만 반드시 온 몸과 마음으로도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러분도 지금은 습관적으로 성당을 오고가는 발바닥 신자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신앙인으로 변화가 되었으면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 뒤까지도 보시는 분이시다. 내가 먼 훗날 그분께 갔을 때 그동안 내가 쓰면서 살았던 가면과 내 몸과 마음이 하나였다는 것을 인정받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셨으면 좋겠다.